생각난다, 그 정동길.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던 빨간 벽돌 건물. 문학 수업을 마치고 몇몇과 서촌과 정동길을 걸었다.
(가을 낙엽이 없다고 E가 보내준 사진 한 장)
생각난다, 그 정동길. 문학 수업을 마치고 몇몇과 정동길을 걸었다. 아마도 서촌을 한 바퀴 돌고 정동까지 온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다른 날에 따로따로 갔을까. 정동길 33번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던 빨간 벽돌 건물. 오렌지빛으로 빛나던 어느 건물 앞이었을 것이다. E가 찍어준 사진 한 장. 아직도 내 핸드폰의 바탕 화면에 깔려 있는. 가벼운 쟈켓 하나를 입은 걸 보면 날이 춥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내 입술은 왜 부르텄을까. 그 가을엔 문학 수업 후에 유난히 골목길 투어를 자주 했다. 독일 가서 외롭더라도 잘 버티라는 말도 그때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위로가 되던 말.
그해 가을날 우리가 걸었던 곳은 경복궁 일대. 서촌의 정겨운 골목길. 먹거리가 넘치던 통인시장. 시작은 자하문로 7길의 이상의 집 방문이었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 자하문로 대로를 따라 효자동 방향으로 직진.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펼쳐지던 정겨운 골목길 풍경. 이색적인 소품 가게와 소소한 볼거리는 얼마나 많던가. 어디서나 발랄하게 튀는 E는 이상의 집 앞에서 행사 도우미들에게 붙잡혀 예정에 없던 인터뷰까지 해야 했고. 조금 걸어가서 북카페로 변한 대오서점 앞에서 찰칵, 찰칵! 이어지는 골목은 필운대로. 효자 베이커리였나. 내가 빵을 산 곳은.
그날 우리의 목표는 수성동 계곡. 끝까지 가보니 그곳에 마을버스 종점이 있더라마는 우리는 골목골목 걸어가는 골목길 걷기 투어에 올인했다. 필운대로 골목 사거리에서 좌회전. 카페일까. 이름이 눈길을 끄는 <고양이를 사랑한 붕어빵>. 그 옆 모퉁이에 <친구 따라 서촌에 온 나비 젤리>가 나란히 있다는 건 이번에 다시 검색하며 알았다. 이름도 예쁜 옥인길. 눈길을 끌던 윤동주 하숙집. 골목길 끝에 서 있던 옥인 제일교회 앞 둥치 큰 나무 한 그루. 시야가 확 트인 수성동 계곡 왼쪽엔 세종마을 어린이집. 이런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맞은편의 오래된 몇 동짜리 연립주택에 둥지를 틀고 살아보고 싶었다.
서울로 오기 전 가장 걷고 싶었던 곳도 정동이었다. 덕수궁 돌담길. 그리고 정동길 사거리. 어느 해 가을엔 부산에서 양희 언니도 올라왔었지. 만추였을 것이다. 우리는 길지 않은 그 길을 아껴가며 걸었다. 그 길을 자주 걷던 어느 날은 그 길의 끝에서 단편을 하나 썼다. 덕수궁 입구 유명한 와플집에서 와플을 찍어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옛 친구가 생각나서. 일본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 만난 친구들. 내가 이십 대 중반이었을 때의 일이다. 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때 만난 소중한 친구 H.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는 그녀와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순전히 H의 선함과 부지런함 덕분에.
정동극장 카페도 간 적이 있지. 누구와 갔을까. 안에도 앉아보고 다음에 갔을 땐 밖에도 앉아봤는데. 꽃이 참 예뻤었는데. 한참 후에 누군가에게 들었지. 그 카페의 2층이 참 좋다고. 나는 2층에는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하고 떠나왔다. 정동 사거리에서 배재학당 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있던 소공동 뚝배기집 순두부도 좋아했는데. 아주 작은 식당이었지. 메뉴 이름도 재미있었다. 순두부 이름 앞에 연도가 붙어 있었다. 가끔 생각난다. 아무렇지도 않고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밥집이. 문을 열면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와 갑자기 고픈 배가 더 고파지는. 추운 겨울날 친구와 산책을 하다가 계획 없이 들러 시린 손 호호 불며 함께 저녁을 먹고 싶은 곳.
정동의 겨울도 좋았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매운바람 싸하게 코끝을 스치던. 머플러를 목에 친친 감고도 어깨를 움츠리고 걷던. 어느 해인가는 그 길의 끝에서 저녁에 문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 집에서 정동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했지. 시청 앞에 내리고도 얼마나 걸어야 했던지. 그래도 좋았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저녁에 문학책과 노트가 든 백팩을 메고 급히뛰어가던 길. 수업을 마치면 서둘러 같은 길을 돌아오던 길. 어느 날은 차갑고 싸늘하던 밤공기가 어찌나 좋던지 뛰다가 걷다가 감탄하며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보던 그 정동길.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난 곳도 정동이었다. 내가 떠난다고 커피를 사주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실은 나도 그랬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만나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과하거나 지나친 작별의 말은 없었다. 내일이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 같았으니까.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정동길을 다시 걷지 못하다니. 친구와 헤어지는 것만큼 가슴이 시린 건 언제 이 길을 다시 걸어보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늘이 무척 흐렸던 것도 기억난다. 카페 창가에 앉았는데 정동길 가로수가 보였다. 바람도 몹시 불었다. 그나저나 언제 이 카페에도 친구와 다시 와 보나. 한국의 겨울은 언제 다시 보나.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정동의 겨울이 단연 최고였는데. 그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