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막바지에 달려온 꽃들에게 꽃말을 붙여준다. 달링, 스위티, 허니, 베이비, 그리고 독일말로 보물이란 뜻의 샷츠까지.
라넌큘라스 Ranunculus
11월의 막바지에 놀러 온 꽃들에게 꽃말을 붙여준다. 달링, 스위티, 허니, 베이비, 그리고 독일말로 보물이란 뜻의 샷츠까지. 학교를 마치고 아이와 걸어서 집으로 갔다. 요즘 날씨가 추워지고 흐려져서 아침엔 주로 버스로, 오후엔 조금 걷다가 지하철을 타기 일쑤였다. 다리와 책방이 나란히 있는 우체국 앞까지는 걸어가야 꽃가게가 나오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꽃들. 저 핑크빛. 발길을 옮길 수가 없다. 절로 쏟아지는 탄성. 난, 못 가. 저 꽃들을 두고는. 아이에게 말 없는 시위를 하자 아이가 또, 또, 또.. 혀를 차며 아주 잠시 기다려 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정신없이 스마트폰의 셔트를 누르는 엄마.
하이 달링. 말끝마다 프레디 머큐리가 입에 달고 살던 말. 입을 열지 않을 때도 멋졌고, 노래를 부를 땐 기절할 정도로 멋졌던 프레디. 철철 넘치는 자만심과 자존감이 매력의 원천이었던 프레디. 프레디의 노래처럼 그의 입가에 무게감도 없이 비단뱀처럼 착착 감기던 그 말, Darling. 누구에게 던져도 신기하게 잘 어울리던. 프레디 이후로 다른 사람이 입에 올리는 달링에는 한동안 감흥이 없을 듯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너무 여러 번 본 부작용이라 불러도 되겠다. 그도 그럴 것이 볼 때마다 새로 들리는 대사가 있으니 어쩌랴. 그 전엔 대체 뭘 보고 들은 거지?
나의 신혼 기간은 길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무려 8년이었으니까. 길고 길었던 연애 기간까지 생각하면.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때 남편과 나는 서로를 Sweety라 불렀다. 독일 남자 아닌가. 나를 만나기 전 인생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살았다는 걸 감안해도. 요지는 이런 남자에게 달링은 언감생심이고 허니나 베이비는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으리란 확신. 내 스위티 발음이 충분히 스위트하게 감겨들지는 못했는지 결혼 후 마르부르크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외국 친구들이 틈만 나면 그게 무슨 단어냐고 놀리던 것마저 달콤한 추억이 되었다. 아, 지금도 스위티냐고? 천만에! 아이와 함께 우리는 서로에게 마마와 파파가 되었다.
속 깊은 만남이 갈수록 어려운 계절이다. 속을 내보일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사람 만나는 데 계절이 따로 있겠냐마는. 예전엔 떠들썩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방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한 명이라도 말이 통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감미로운 커피 한 잔. 유리잔에 담긴 뜨거운 차. 고혹적인 와인의 색채와 향. 그보다 더 좋은 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 말을 더 잘 들으려 앞으로 살짝살짝 기울어지는 각도. 얼굴도 안 보고 목소리에 기대어 세 시간을 쉼 없이 오가는 대화. 그 사이로 맹랑한 한 시간이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다며 두 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믿어버리는 철석같은 착각. 그 속에서 11월의 꽃말들이 뮌헨의 아침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 Honey나 Baby처럼 기분 좋게. 때로는 달착지근하게.
친구나 가까운 동료에게 쓰는 말 중 '자기'라는 말. 나도 그 말을 누군가에게 쓴 적이 있지. 요즘은 쓸 일도 쓸 사람도 없지만. 한국어 중 친밀하다고 생각되는 말 중에 하나다. 한국 사람과 결혼을 안 해봐서 '여보'란 말은 쓴 적도 쓸 일도 없어서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이 든 부부의 경우만 빼고. 그래서 시인처럼 '당신'의 손을 들어준다.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 독일어의 '샷츠 Schatz'. 우리말로 하면 보물, 보배, 귀중품이란 뜻. 연인끼리, 부부끼리, 특히 부모가 아이들을 부를 때 다정함의 극치다.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 애칭을 i음으로 마무리하는 언어답게 모든 샷츠 Schatz는 이럴 때 샷치 Schatzi가 된다.
오늘은 2018년 11월 24일. 특별히 오늘을 기억해 두고자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27주년 기일. 특별히 한 사람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다. 내 선생님을. 며칠 전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몇 달 만이었다. 요즘 책을 잘 사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책방을 일부러 지나치신다고. 책을 들 기력조차 딸리신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래서 오디오북을 들으신단다. 뮌헨의 영화관에서 지금까지 네 번 프레디를 만났다. 딱 한번 오후에 갔는데 영화관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두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기에. 프레디의 위트와 재치와 열정과 미워할 수 없는 자뻑 속에 오버랩되는 내 선생님을. 내 선생님처럼 멋지고 멋졌던 프레디를.
어느 꽃의 꽃말이 달링, 스위티, 허니, 베이비, 샷츠냐고? 글쎄, 일단은 꽃 이름부터 파악해야겠다. 아시는 분들은 알려주시길. 그러면 나 역시 점찍어둔 꽃말을 알려주겠다. 꽃말처럼 달콤하거나 감미롭게. 다만 프레디에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핑크와 화이트와 노란 라넌큘러스 Ranunculus를 다발로 바쳐야겠다. 꽃말은 당연히 '달링'. '어느 누구도 나의 참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이가 무대 위 나의 페르소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나의 명성과 스타덤과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일까. 그는 말한다. '이 세계에선 진정한 친구를 찾거나, 그런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아니야, 프레디. 외롭고 고독했던 당신의 내면까지도 난 사랑했어!
독일어 란운켈 Ranunkel은 라넌큘라스 Ranuncul를 뜻한다. 꽃말은 비난, 매력, 매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