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비가 내리는 뮌헨의 가을날. 시월도 사흘을 남겨두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위해 배경을 깔아주는 정도로 생각하자. 뭐든 좋게 생각할 여지는 있는 법. 아무것도 아닌 날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심심한 듯 된장 한 술 떠 넣은 무 배춧국을 끓이자 떠오르는 얼굴.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선생님이다. 오늘도 기침이 끊이지 않는다 하셨지. 짧은 톡으로 먼 곳의 선생님을 위로하는 가을밤. 이런 한가한 가을밤도 좋아라.
소쿠리를 하나 샀지. 어떻게 이런 게 독일에 다 있을까 싶게 크고 맑은 소쿠리. 배추 절이기에도 좋겠고, 무, 배추, 감자, 양파, 당근, 마늘, 사과, 자몽, 토마토, 망고, 오이, 양상추.. 뭘 넣어도 어울릴 것 같은. 그 소쿠리를 사들고 돌아오던 날의 오후를 생각한다. 아이와 낙엽이 소복이 쌓인 우리 집 옆 잔디공원을 오래 걸었지. 소쿠리에 노랗거나 초록빛 낙엽을 넣고 사진도 찍고. 낙엽도, 나무도, 햇볕도, 하늘도 담았다. 그러길 정말 잘했다. 다음날부터 줄곧 비가 내렸으니까.
낙엽 위를 걸을 때는 한 발 한 발 낙엽들을 쓸며 걸었지. 천천히 걸으려고. 아까워서. 아직까지 파릇파릇한 잔디 위로 빨강 노랑 갈색의 낙엽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앉거나 흩어지거나 모여있는 햇살. 저런 사이는 참 편안하구나. 언제 봐도.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도 좋았다. 그늘이 있어 모든 풍경에 생동감이 살아났다. 그늘까지도 고마워지고 다시 보이는 가을날 오후. 발밑에 쓸리는 낙엽들 사이에서 파도 소리가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선가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든 생각. 늦가을 아침 마당에 떨어지는 홍시처럼 물러지진 말아야지. 내색도 말아야지. 안간힘을 쓴다. 그래 봤자 남는 게 없었기에. 도토리처럼 단단해지기. 올 겨울 프로젝트 중 하나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기. 겨울잠을 준비하는 다람쥐들처럼. 다람쥐들도 겨울잠을 잔다. 자다가 3~4일에 한 번씩 깨기도 한다던가. 쉬가 마렵거나, 위협을 감지하거나, 봄이 왔다고 느낄 때. 나도 자다가 깰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난 보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다람쥐는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겨울잠을 자나?
꽃병도 하나 샀다. 내가 산 건 아니고 언젠가 부지런한 조카가 대형 벼룩시장에 들렀다가 이모의 취향인가 싶어 사진을 보내왔다. 차를 담는 티폿인데 뚜껑이 없단다. 그럼 어때. 꼭 차만 담으란 건 누가 정했나. 저리 예쁜데. 뚜껑 없는 찻주전자라고 말도 안 되게 싸게 주더란다. 파티에 가고 싶을 때도 미리 드레스부터 사놓으란 말이 있지. 꽃을 사고 싶어 슈퍼에 들렀더니 오래된 꽃들을 반값에 팔았다. 저리 예쁜 꽃을 그리 싸게 내놓으면 어쩌나. 모른 척할 수가 없다. 꽃들에게도, 기다리는 꽃병에게도 양쪽 모두에게 미안한 일. 사실은 빨간 싸릿대 닮은 줄기 하나에 반해 샀다는 사실은 끝까지 비밀에 부치려 한다.
우리 집 발코니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 이웃집 발코니에는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진짜 새는 아니고 줄에 매달려 바람이 불면 계속 돌아가는 가짜 새다. 옆모습일 때는 몰랐는데 새의 뒷모습이 견고했다. 외로워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사람하고 똑같구나. 난간 쪽에 매달아 놓은 새장이 특히 예뻤다. 진짜 새도 아닌데 새장까지 마련해 놓은 집주인의 마음. 저녁 무렵 비가 그쳤다. 내일은 해가 나올까. 사흘째 집 밖에도 안 나가다가 오늘 꽃을 사들고 들어왔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하루였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 그런 순간들의 아름다움이라니. 시월의 마지막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