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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an 18. 2019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오후 2시와 3시 사이


나의 하루에 리듬을 주는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게 없는 나날들. 아직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이 시간들을 사랑하려 한다.



지난주 내내 벼르던 무와 배추를 샀다. 빅투알리안 마켓에서 집까지 오는 버스가 있어 얼마나 편한지. 미루던 빨래를 돌리고 큰 냄비에 끓여놓은 미역국도 있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의 오후 2시와 3시 사이. 카페에 있는 시간을 정오까지로 정해 두지만 넘길 때가 많다. 글이 잘 써지면 잘 써지는 대로 반대라면 반대 이유로.

 

카페를 나오는 길에 장도 보고 빵도 사고 집에 돌아와 빨래나 청소를 하기도 다. 쓰레기도 분리하고 간혹 우체국에들른다. 점심을 먹은 후엔 간혹 떨어진 단추나 구멍 난 양말을 깁거나 설거지도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찾아오는 오후 2시. 마른빨래를 , 빨래를 널고, 재활용 쓰레기를 고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시간까지 더하고 빼면 내게 주어진 단 한 시간. 오후 2시와 3시 사이.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커다란 쿠션에 기대어 아무것도 안 하거나.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메모도 한다.  일이 없는 한 이 시간을 지키려 노력한다. 나의 하루에 리듬을 주는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게 없는 나날들. 아직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이 시간들을 사랑하려 한다. 오전에 그토록 쉬고 오후에 또 쉬냐고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언컨대 나는 카페에서 쉬지 않는다고 장담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자기는 매일 학교에 가고 파파는 회사에 가는데 엄마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내가 말했다. 아니야, 엄마도 매일 카페에 출근해. 그러자 아이가 금방 이해했다. 아, 카페가 엄마 학교구나! 그렇다. 카페는 내 학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는 장소. 나만의 방법으로. 나름 성실하게.



남편의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 지 2주째. 아직까지 큰 불편이나 어려움 없이 잘 해내고 있다.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고부터 생긴 변화는 오후부터 저녁 시간까지 바빠졌다는 것.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 하루 단위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도 덤으로 얻는다. 무엇보다도 갱년기를 의식할 틈이 없고, 간혹 그런 증세가 오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또 왔구나 지켜볼 뿐. 그러다 보면 일이 끝날 때쯤 증상이 나아졌다.


이때의 일이란 물론 도시락 준비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 도시락을 싸고 식사까지 준비하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저녁에 미리 재료를 준비해 두기로 했다. 오후에 아이 간식과 저녁을 챙긴 후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남편은 7~8시 사이에 귀가한다. 일반 독일 남편들의 귀가에 비하면 두어 시간 늦는 편이다. 저녁을 먹지 않는 다이어트를 실행 중인 남편을 돕기 위해 내 머리와 손이 두 배로 바빠졌다.


아침을 든든히 먹을 것. 치즈와 살라미를 넣은 빵. 떠먹는 요구르트에 사과, 오렌지, 바나나를 듬뿍 넣는다. 여기에 삶은 계란과 오렌지 주스 한 잔. 하다 보니 카타리나 어머니의 아침 식단을 따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정교육이 중요한 이유. 아침마다 세 개의 빵을 준비하는 건 남편의 일. 남편의 큰 도시락 통에는 각종 야채에 닭가슴살이나 참치나 치즈를 넣은 샐러드와 매일 다른 종류의 파스타를 넣어 준다. 오래전 이태리 형부에게 전수받은 레시피에 기대어. 


어쩌면 새해 남편의 도시락이 신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 남편은 다이어트를 챙기고 나는 갱년기를 접수하고. 이것이 일거양득 아니면 뭔가. 덕분에 부지런해졌다. 매일 슈퍼에도 들르고, 내일의 메뉴를 생각하느라 머리도 자주 쓴다.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아침에도 바쁘고 저녁에도 바쁘니 오후의 휴식이 더욱 소중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나만의 시간.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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