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뮌헨의 마리 Jan 23. 2019

수화를 하는 남자들

말이란 무엇인가


말이란 무엇인가. 청년이 중년 남성을 향해 검지를 들어 세 번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자리를 떠날  때 내 양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자리를 뜰 기미를 보였다. 독일은 큰 카페나 레스토랑은 예외 없이 화장실이 지하에 있다. 평소에는 노트북과 가방을 두고 옆자리에 부탁하기도 하는데, 그날은 노트북과 폰을 들고 갔다. 가방은 의자에 걸어두고 외투를 걸쳐두었다. 경험상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이 아니라서 크게 염려되지는 않았다. 50센트 동전도 챙겼다. 화장실 앞에 누군가 있으면 내고, 없으면 그냥 온다. 이곳 사람들도 대체로 그렇게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자리를 지나칠 뻔했다. 탁자가 일렬로 촘촘하게 놓여 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떠날 때와 달라진 풍경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을 보고서야 내 자리임을 알았다. 왼쪽엔 러시아 말을 하는 세 명의 남녀가, 오른쪽엔 두 명의 남자가 수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 대각선 쪽에 앉은 사람은 중년의 남성. 바로 옆에 앉은 남자는 청년이었다. 30분 정도 청년이 격렬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그의 입에서 짤막한 소리가 터져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손짓으로 내 쪽을 가리키며 흥분하지 말라는 듯 심판처럼 두 손을 펴고 위아래로 두 번 누르는 제스처를 했다.


청년이 말을 하는 동안 중년의 남성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고 두 팔은 등받이에 걸친 채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언어 장애가 없는 사람 같았다. 청년이 말을 끝내고 테이블 위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만 같았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청년을 말리며 수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두 남자의 격렬한 토론을 옆자리에서 보고 들었다. 때로는 중년 남성가볍게 주먹을 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자 청년이 같은 동작을 했다.



두 번째 30분은 주로 중년 남자가 말을 하고 청년이 그의 말을 들었다. 청년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다른 팔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중년 남성의 말을 심사숙고하며 듣는 눈치였다. 중년 남자가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이 그를 따라 했다. 시간은 정오를 훌쩍 고 있었다. 주말부터 날씨가 차가워져서 어딜 가나 추웠다. 지난주엔 카페에서도 등허리가 시리더니 그날은 발까지 시렸다. 창밖은 흐리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두 남자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말이란 무엇인가. 청년이 중년 남성을 향해 검지를 들어 세 번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중년 남성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청년의 손은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중년 남성이 청년 가까이로 상체를 바짝 들이대고 그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청년이 흥분한 듯 손동작이 빨라지자 그의 상체가 다시 등받이로 물러났다. 그의 두 손이 위로 향하는 듯하다가 체념한 듯 내려오며 중년 남성의 손동작이 슬로 모션으로 바뀌자 청년의 입에서 잠깐 웃음소리인지 감탄사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학에 다닐 때 같은 과 선배 중에 수화 동아리를 이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말고는 내가 수화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새어머니 댁에서 TV를 시청할 때였다. 독일 대통령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전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내가 놀란 건 스크린의 반을 차지한 수화 통역자였다. 그녀의 입모양과 동작이 얼마나 큰 지 마치 무대 위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말이란 무엇인가. 두 사람은 1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계속했다. 청년의 손가락이 무전을 치듯 쉴 새 없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만족할 만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글 하나를 쓰고 나면 에디터를 자청하는 사람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녀가 지적한 부분을 받아들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요즘엔 요령이 생겨서 감정을 상하지 않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단계까지 왔다.  



말이란 무엇인가. 수화의 시스템은 잘 모르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 아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느낌을 손으로 다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벽할 수야 있겠나. 방금 청년이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깊이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중년 남성이 한 손을 펼치고 주먹 쥔 다른 손을 복서처럼 몇 번이나 두드리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내용을 몰라도 짐작할 수는 있다. 완벽한 소통이란 게 애초에 가능이나 한가.


다시 30분이 지나고 두 남자 사이에 휴전이 왔다. 두 사람 다 말없이 각자의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년 남자가 주로 읽는 편이라면 청년은 주로 쓰는 편. 청년이 뭔가를 보여주려는 든 자신의 폰을 중년 남성 쪽으로 기울이는 장면. 중년 남성이 청년의 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폰을 청년에게 보여주려 하자 청년의 상체가 먼저 테이블 위를 가로질러 그를 향해 기우는 장면.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두 남자의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맞은편의 중년 남성을 잠시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보아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청년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등을 돌려 카페를 걸어 나오며 다이달로스를 생각했다. 날개를 달아주려던 아버지를. 목소리란 무엇인가. 청년이 가졌을 수도 있었을 목소리. 그에겐 목소리가 날개였을 것이다. 강물 위를 나는 바람 소리나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를 닮았을지도 모를, 그 누구도 자신조차 들어본 적 없었을 그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