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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an 25. 2019

Come è la vita?(꼬메 에 라 비따)

삶은 어떤가.


바바라는 모른다. 이태리어를 배우는 것이 독일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열치열 비슷한 원리다. 독일어 배우며 받는 스트레스를 이태리어 공부하며 푸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에 그렇단 뜻이다..


어젯밤의 일이다. 한국어로 된 기초 이태리어 회화책을 부엌 테이블 위에 펴놓고 있었다. 늦게 퇴근한 남편이 이태리어 교재를 보더니 큰 소리로 웃는 게 아닌가. 웃음의 의미를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을 비웃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인 데다 아내에게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미소로 화답하면 그만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와이프가 뭐라도 하는 게 저리 좋을까. 어디라도 정신을 분산하면 잔소리가 적으려나 싶어서? 말이 되는 추측이다.


한번 결정을 하면 나는 재빨리 행동에 옮기는 편이다. 심사숙고란 없다. 지난 주말에 바바라에게 자극을 받은 끝에 당장 이태리어 공부를 실행에 옮겼다. 월요일 저녁이었다. 남편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책꽂이 상단에 나란히 꽂혀 있는 외국어 책들 중 이태리어가 눈에 꽂히는 게 아닌가. 문제는 이틀 정도 들고 다녀보니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치사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메모용 노트를 얻었고, 거기에 간단한 생활 회화를 옮겨 적던 중이었다. 오며 가며 읽으려고.


바바라는 시민문화센터인 폭스 호흐 슐레(VHS)에서 수년 째 이태리어를 배우고 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다. 바바라 입이 좀 무거워야지. 조카가 독일어가 안 되니 이태리어로 이야기하라고 해도 둘이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이태리어 강좌는 계속 다니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나에게 이런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지금 이태리어를 수강하면 수업료를 30% 디스 카운 해준다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 나도 배우고 싶은데, 했더니 묵묵부답. 왜, 독일어나 하라고? 내가 묻자 그렇단다.



바바라는 모른다. 이태리어를 배우는 것이 독일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열치열 비슷한 원리다. 독일어 배우며 받는 스트레스를 이태리어 공부하며 푸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에 그렇단 뜻이다. 옛날에 마르부르크에 살 때였다. 대학 도시라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몇 명이 어느 날 일본어 강의를 듣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머리를 식히려고 배우는 거란다. 일본어를 배우느라 쩔쩔매는 독일 학생들을 보며 자존감 회복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얻는다고. 이해가 되었다. 이태리어를 배우는 데는 어떤 부담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독일에 오기 전에 이태리 형부에게 몇 개월 동안 기초 이태리어를 배웠다. 여성과 남성에 포함되지 않는 중성형이 존재하는 독일어와는 달리 명사의 성에 여성형과 남성형만 있다는 것. 명사뿐 아니라 형용사에도 성을 구분한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고.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멋진 공연을 보고 난 후 박수를 치며 내지르는 환호성에 '브라보'가 있다. 독일어로는 그냥 '브라보'다. 이태리어 형용사는 남성일 때는 bravo지만 여성일 때는 barva가 된다.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형용사 bello와 bella처럼.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사소한 차이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부정관사와 정관사도 배웠다. 나를 놀라게 만든 건 이런 것. 정관사에도 복수형이 있다니! 영어의 a나 the를 생각해 보라. 이들의 존재조차 부담이거늘 단수와 복수로 구분까지 해야 한다니. 독일어의 부정관사와 정관사도 우리를 기죽이지만 그래도 단수와 복수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기본 양심은 있는 편. 이태리어의 전치사 역시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데, 특히 전치사들이 정관사와 결합할 때가 장관이다. 전공자가 아닌 한 대부분 나처럼 이 시기에 한번 꺾이지 않을까. 이런 한탄과 함께. 누가 이태리어를 만만하다고 했는가!  



내가 이태리어를 배운 이유는 아이가 김나지움에 진학할 때를 대비해서다. 제1 외국어인 영어와 함께 제2 외국어는 프랑스어일 확률이 높지만 스페인어나 이태리어일 경우의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의 공부를 핑계로 나 역시 새 언어에 도전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유럽에 사는 장점이 이런 것 아닐까. 이태리어, 스페인어, 얼마 전부터 사랑에 빠진 포르투갈어까지 기초라도 배우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독일에 사는 수많은 이태리 사람과 이태리 레스토랑과 휴가를 떠나기에도 좋은 나라 이태리. 이모부도 이태리 사람이고, 내가 아침마다 출근하는 곳도 카페 이탈리이니 독일에 살면서 안 배우는 게 손해인 언어가 이태리어다.


바바라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내가 이태리어 맛을 조금 봤다는 것. 어학을 공부해보니 나이를 실감하겠다. 더 이상 암기는 꿈도 꾸지 못한다. 본문이든 문법 설명이든 연습 문제까지 소설 읽듯 읽는 수밖에. 신기한 건 그럼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 이해력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다. 아직도 걸 게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위로하면서. 올해 연말 바바라의 생일날에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볼까. 티라미수나 파네토네를 사들고 이렇게 이태리어로 멋진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다.


며칠째 계속 흐리다가 마침내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오늘 아침 나를 이태리어 사색으로 이끈 건 이런 한 문장이다. Come è la vita?(꼬메 에 라 비타? 사는 건 어때?) 연일 기온이 떨어지고 해는 실종해버린 요즈음 뮌헨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보면 춥다고 난리다. 춥긴 춥다. 그래도 서울만큼 추운 건 아니다. 때가 되면 언젠가 해도 얼굴을 보여주겠지. 밤새 싸락 싸락 내린 싸락눈을 밟고 아이 학교 앞에서 카페 이탈리로 걸어오는데 내 발자국 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음악 같은 이태리어 문장을 듣는다. 꼬메 에 라 비타. 삶은 어떤가. 이만하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1월의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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