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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여

나의 선생님

by 뮌헨의 마리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삶이여 만세 VIVA LA VIDA>


내가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본 것은 딸아이 덕분이었다. 한국 나이로 아홉 살 딸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 장래 희망은 화가. 연필을 잡은 이래 변하지 않는 소망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어릴 때 아이가 3년 동안 그린 건 딱 한 가지. 라푼젤이었다. 성. 꼭대기에 막대기 하나. 바닥까지 닿는 선. 그게 다였다. 삼 년 동안 라푼젤도 경이로운 발전을 거듭하여 아이의 그림에도 날개가 달렸다. 더 이상 라푼젤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만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내게도 예외는 있었다. 아이가 6살이 되던 해 아이패드에 'Who 만화 위인전 전집 50권' 앱을 사서 깔았다. 태어날 때부터 시작한 책 읽어주기 목록에 위인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아이는 위대한 인물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개 읽어주다 싱겁게 끝났다.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은 어떻게 아이를 키워?"

3월에 독일 할머니 댁을 다녀오던 날 아이가 물었다. 뮌헨 중앙역에서 한 손엔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한 손엔 기저귀 가방을 든 젊고 아름다운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서둘러 역사를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아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나 역시 콧날이 찡했으니까. 그때 번개처럼 떠오른 것이 Who 시리즈였다.

"헬렌 켈러를 읽어 보자!"

그날 이후 아이는 파파가 읽어 주는 해리 포터와 사랑에 빠진 채 조앤 롤랭을 읽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지구를 떠난 것을 애도하던 엄마와 스티븐 호킹을 읽었다. 네 번째가 프리다 칼로였다. 처음부터 내킨 건 아니었다. 그녀의 지난한 삶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죽 내려가던 아이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프리다 칼로. 내 입에서 화가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 대결할 도리밖에. 프리다 칼로를 읽고 나는 울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내 심장은 두껍지 않았으므로.



'내가 나를 그리는 이유는 너무 자주 외로웠기 때문.'


6세 때의 소아마비와 18세 때의 끔찍한 교통사고로 서른두 번의 수술과 마지막 순간에는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까지 받은 프리다 칼로. 의사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던. 그리고 세 번의 유산까지. 140여 점의 작품 중 왜 절반이 초상화인가에 대한 프리다 칼로의 답은 외로움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 '삶이여 만세(VIVA LA VIDA)'를 보다가 내 선생님을 생각했다. 프리다 칼로의 삶이 선생님의 삶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평생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온 선생님. 공교육의 혜택마저 받지 못해 책 속에서 홀로 길 없는 길을 찾던 선생님. 교통사고로 마흔을 넘못하리란 선고를 받기도 하고, 집 문 밖을 벗어나기 어렵던 여성 장애인들을 위해 전국 최초로 부산여성장애인연대라는 총대를 매기도 했던. 프리다 칼로를 읽고 잠시 생각에 잠긴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프리다의 마음을 알았어? 프리다가 어떤 기분인지, 무엇을 느꼈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서로의 심중에 깃든 내밀한 고독을. 스물두 살의 찬란한 대낮에 다섯 달 동안 은빛 바퀴만 쓰다듬으며 바라보던 선물, 나무 휠체어에 기대앉아 집 밖으로 나와 바라본 첫 골목길을. 선의라곤 없던 사람들의 생경한 시선을. 햇살에 반짝이던 나뭇잎을. 눈이 부셔 마주 볼 수 없던 태양을. 100미터도 못 가 쫓기듯 돌아와야 했던 심정을. 그 후 며칠을 틀어박혔던 다락방을. 골목길 산책에 익숙하기까지 5년 동안 선생님의 마음을 무시로 들고났을 바람의 횡포를.


'왜 발을 원하니? 내게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그렇지 않니, 프리다?'


외로울 때마다 프리다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프리다의 말을 읽으며 나는 내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장애의 삶이란 구름 위를 걷는 것과도 같다던 선생님의 고백도 생각났다. 나는 선생님의 바벨탑이 완성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47년 프리다의 생애가 성취한 140점이 넘는 피의 진군을 선생님께 원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여성장애인이라는 무거운 총대는 내려놓으시길. 액땜하듯 40 넘고 60마저 무탈하게 넘어오셨으니 70 넘어 80까지 넘고 또 넘어 주시기를. 그리고 같이 늙어가는 것이다. 평온하게. 선생님의 생에 없던 그 단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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