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스, 이네스

화내는 연습 후기

by 뮌헨의 마리



이네스를 만났다. 전날부터 아니 이번 주 내내 좋은 얼굴로 인사하고 헤어져야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학교 앞에서 아이를 보내고 다른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눴다. 6주간의 방학.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별. 2년 동안 같은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이곳 아이들의 마음은 반학기만 합류한 우리 아이와는 분명 결이 다를 것이다.

독일의 초등 과정인 그룬트 슐레는 총 4년. 1, 2학년은 저학년. 3, 4학년은 고학년이다. 담임은 2년제. 3, 4학년 성적으로 인문계와 실업계로 갈린다. 성적표는 매 학기마다. 중간고사도 순위도 없다. 김나지움은 대학으로 진학하는 중고등 통합 과정. 5학년에서 12학년까지다. 김나지움에 가는 학생 수는 약 40%. 대학 입학시험은 따로 없고, 김나지움 졸업시험 아비투어 점수로 가름한다. 김나지움의 대학 진학률은 반에 반도 안 된다고.


학교 앞에서 이네스가 다른 학부모와 얘기 중이었다. 기다렸다. 좀처럼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기다리는 걸 보고도 알은 체도 않는다는 건? 아하,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려 나하고는 말도 않겠다는 뜻! 그건 이네스 사정이고, 이런 식으로 방학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말을 걸었다. '할로, 이네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녀. 원래 하려던 멘트는 '방학 잘 보내.' 였는데 당황해서 나온 소리가 '나중에 보자.'였다. 고개만 끄덕이고 상대방과 대화에 몰두하는 그녀. 한 마디로 보통 성격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것은 내가 아는 독일식이 아닌데. 서로 얼굴을 붉혔다가도 다음에 만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나누면 겉으로는 봉합되는 게 이 나라 방식 아니었나? 시댁과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이 '합리'를 최대의 모토로 삼는 시민적 태도 아니었어? 감정이 앞서는 한국 며느리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신 시댁 식구들에게 포인트 열 점씩 얹어주고 싶은 아침이었다.

카페로 가는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눈에 익은 월남치마가 휙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이네스였다. 내 뒤쪽에서 왼편으로 꺾어 돌아서는 중이었다. 대단한 사람. 저런 타입이라면 언젠가는 비슷한 일이 터져도 터졌겠다. 매를 미리 맞은 걸로.


지난 부활절에는 알바가 외할머니를 뵙고 왔다며 사진을 보여주길래 좋았겠다 하니까, 1년에 딱 한 번 만난다 해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나 역시 친정 엄마에게 살가운 편이 아니라서 괜히 찔려서.

잘 되리란 기대는 없었다. 한 번 틀어진 사이가 그리 쉽게 봉합이 되겠나. 생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그래도 방학 잘 보내란 말은 하고 헤어져야지. 웃으며 그 말을 하려던 것뿐이었다. 같은 반 학부모 이상의 관계는 바라지도 않았고. 지난번 내 글쓰기는 확실한 뒤끝.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오전 11시 이탈리 카페. 알람이 울리자마자 노트북을 접었다. 이네스 사태 이후 변화다. 군기가 번쩍 드는 효과는 있었다. 어떤 때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시계를 보고 깜짝깜짝 놀란 적도 있고. 알고 보면 소심한 내가 이번 일로 간이 조금 더 오그라든 것 같다.

2층 교실 복도로 올라가자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 허리를 안은줄을 서서 울었다. 덤덤한 얼굴로 나타난 건 우리 아이뿐. 누굴 닮아서 저렇게 눈물이 없나. 나 닮은 것 같았다. 서울 독일학교에서도 마지막 날 아이가 떠난다고 친구들이 운동장까지 쫓아와서 울더라는 얘기를 다른 학부모에게 들었다. 그러면서 그 엄마가 덧붙이는 말, 알리시아만 안 울더라고. 이네스의 딸 알바도 울어서 눈이 빨갰다. 선생님과 포옹을 풀고 돌아서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바야, 여름방학 잘 보내렴."


알바는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 못 들었나? 내가 어깨에 손까지 얹으며 말했는데? 충격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한국말로 말했다.


"알바 원래 그래. 내가 말해도 대꾸도 안 해. 바로 앞에서 묻는데도."


학교 앞에서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아직도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네스도 있었다.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보나. 모든 일은 타이밍인데. 용기를 냈다.


"방학 잘 보내, 이네스!"


그녀는 끝까지 웃지 않았다. 마지못해 돌아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서는 내 속은 후련했다. 츄스, 이네스! 아듀, 이네스! (안녕, 이네스!)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올 가을 3학년부터 우리는 방과 후를 신청했다. 이네스는 4학년 졸업 때까지 방과 후 없이 지금처럼 일찍 데리고 올 것이다. 급식이 형편없고, 교과 과정이 알바에게 너무 쉽다고.


올여름 최고로 무더웠던 이날 뮌헨의 기온은 29도. 주말엔 30도까지 오른다는 기상 예보도 들렸다. 무성한 가로수 그늘 아래로 시 한 구절이 내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 경쾌하게 달리던 7월의 끝자락이었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의 시 '강'에서 인용함.



p.s. 자기가 등장하는 글을 듣고 싶어 조르는 아이에게 이 글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글은 할머니의 마멜라데, 리타 아주머니, 그리고 이네스 편.
"엄마는 너무 글 재밌게 쓴다!"
아이의 한 마디에 우쭐해져 사족을 단 게 화근이었다.
"엄마 이번엔 화도 안 내고 잘 썼지?"
"그건 화낼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
왜 화를 낼 일이 아니냐고, 그건 또 무슨 뜻이냐고 묻지는 못했다. 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지 무서워서. 이럴 때 아이들은 거짓말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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