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편지 34

by 뮌헨의 마리


스완에게 고뇌를 알게 한 것은 바로 사랑으로, 사랑이 고뇌를 숙명으로 만들고, 독점하고,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운 샘!


뉴욕은 잘 다녀오셨나요? 저희는 이번 주말에 온 가족이 새어머니가 계신 레겐스부르크를 다녀왔어요. 알리시아 학교가 핑스턴(오순절) 방학이거든요. 토요일에 갔다가 엄마 아빠는 일요일에 집으로 돌아오고 알리시아는 월요일에 할머니와 함께 뮌헨으로 왔답니다. 엄마가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은 아니니 염려 마세요. 알리시아도 하루 정도는 괜찮대요. 자기 전에 엄마 아빠랑 통화할 폰도 들고 갔거든요.


다행히도 알리시아는 새할머니를 포함 한국과 독일의 할머니 세 분을 다 좋아한답니다. 샘 말씀대로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지요. 알리시아가 싫어한 것은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 없이 홀로 자는 것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답니다. 우리 나이로 열 살이 고도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부모 자식 사이에도 대화가 중요합니다. 아이로부터 이런 어여쁜 고백을 들을 때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니다.


샘.

오늘은 저에게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글쓰기 1주년을 한 달 앞두고 300번째 글을 쓰는 중이거든요. 제가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 중에는 1000여 개가 훌쩍 넘는 글을 지금도 매일 쓰는 분이 있어요. 그런 내공까지는 아니어도 마라톤을 하듯 300일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시간과 매일 새 글을 기다려 주신 샘을 포함한 열정적인 팬들 덕분이지요. 얼굴도 모르는 저의 글에 응원 아끼지 않으시던 420여 분의 구독자님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어머니의 친환경 아파트 단지에 핀 꽃들


우리가 나무들 사이 산책로에 이르자 생틸레르 종탑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 앉아 하루 종일 종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싶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주위도 고요해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와도 낮의 고요를 깨트리기는커녕, 오히려 낮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다 제거하고, 또 종탑이 할 일 없는 사람의 무료함과 주의 깊은 정확성으로 충만한 고요함을 원하는 시간에 눌러 짜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성당을 사랑했던가! 지금도 얼마나 눈에 선한지! 우리들의 성당!(..) 성당 채색 유리는 햇빛이 나지 않는 날에만 찬란하게 반짝였는데, 따라서 밖의 날씨가 흐리면 성당 안 날씨는 예외 없이 화창했다.(..) 이 채색 유리들은 너무도 오래되어서, 그 은빛 감도는 고색창연함이 여기저기 수세기 동안 쌓인 먼지 위에서 반짝거렸고, 또 그 부드러운 유리 융단을 짠 실까지도 너무 닳고 닳아서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 존재가 어떤 미지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미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사랑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며, 사랑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완에게 고뇌를 알게 한 것은 바로 사랑으로, 사랑이 고뇌를 숙명으로 만들고, 독점하고,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새어머니가 사시는 친환경 아파트 단지

샘.

무더웠던 전날과는 달리 흐리고 서늘했던 일요일 오전에는 10시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새어머니와 넷이 나란히 산책을 했어요. 도나우 강변과 공원의 나무들. 구시가지의 오래되고 이끼 낀 돌집들. 높고도 좁은 골목길들. 그 속을 바람처럼 돌아다니던 건 프루스트의 빠져나온 듯한 이런 언어들이었지요. '사파이어처럼 깊은 투명함과 견고한 단단함.'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삶이 항상 행복한 오후의 연속이기만을.' 읽기만 해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들이지요.


토요일 밤엔 넷이 새어머니의 야외 발코니의 크고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클레멘스의 학교 에피소드를 들었답니다. 어머니가 매일 감상하신다는 저녁 노을이 어떻게 물들어가는 지도 찬찬히 지켜보면서요. 어머니는 차고 맑은 샴페인을 좋아하신답니다. 혼자서는 맛이 안 나니 우리가 가면 낮이고 밤이고 샴페인을 권하시지요. 발코니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시는데 혼자서는 거의 안 나가신대요. 그 말씀을 듣는데 마음이 안 좋았어요. 커다란 야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쓸쓸한 일이 있을까요.


샘의 시간은 뉴욕에서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하네요. 장거리 비행으로 기진맥진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그날 늦게까지 물들어 있던 서녘 하늘 한 조각을 보냅니다. 제철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 제 시간에 지는 석양, 무르익어야 할 때를 아는 과일들. 이런 것들이 시간을 견디고 고독을 이겨내게 합니다. 저는 올해에 천연두를 앓게 하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한여름 손님이 되려고 하니 각오 단단히 하시고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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