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뮌헨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예외 없이 모두가 '유'에서 멈췄다. '정'이 뭐길래 그게 그리 어렵나.
시누이 바바라는 사워 Saur라는 성 말고도 총세 개의 이름을 가졌다.따라서풀네임도길다. 바바라 카롤리네 마리아 사워 Barbara Karoline Maria Saur.바바라도마리아도부르기가쉽다. 톰이나 잭, 제인이나 모니카처럼. 그러나바바라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이름은가시덤불로 뒤덮인난공불락의 성 안에서조용히 잠자는 카롤리네였다. 본인에게는바바라보다우아하게들린다나. 나의시어머니와친가, 외가 할머니등 세 사람이지었다는그녀의 이름은 어찌 됐건 '바바라'가총대를 매고 선두에 서게되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내가 궁금했던 건 바바라가아니라카롤리네로 살았다면 그녀의인생이 달라졌을까.이름 때문에 인생이 무거워진 케이스가바로나다. 시댁 식구들은 불굴의 의지로 사돈의 팔촌까지 내 이름을 외워서불러주었지만문제는 타인들.내 이름이 그리 어려운 줄은 뮌헨에 와서처음 알았다. 독일에서 결혼하고 어학연수를 할때만 해도문제가없었는데작년뮌헨에 온 이후로가족 말고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예외 없이모두가 '유'에서 멈췄다. '정'이 뭐길래그게 그리어렵나.
나도 남들처럼 영어 이름을가질 때가 된 건가고민하며 보낸 시간이 1년. 이 나이에 영어 이름이라니. 아이학교 학부모들을 만나면 '그냥 '유'라고 불러', 했건만 사정이여의치는 않았다. 학부모과는애써이름을 외워줄만큼각별한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러다 마침내 결단의 날이 왔다. 지난 주말의 마사지 코스. 총 여덟 명의 참가자 중 프랑스 출신이 두 명, 이태리 출신이 한 명이었다. 남자 셋, 여자 다섯. 토요일 아침 열 시였다. 우리들의 이틀을 책임질 강사는 베티나. 골격이 단단하고 키가 장대한 친절한 독일여자 선생님이었다.
수순은 자기소개부터. 침상이 네 개인 마사지 룸에서는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실습을 해야 했다. 남녀 불문 최대한 모든 참가자들과 상대를 바꿔 실습을 해 보는 게 목표였다. '난 한국인. 이름은 유.. 아니야, 그냥 마리라고 불러!' 그러나 자격증에는 반드시 한국 이름을 넣어 달라고부탁했다. 왜 마리냐고? 이십대때 성당을 다녔는데 세례명이 마리안나여서 나를마리 Mari라고 불렀다. 올해 독일어로 카뮈의 <이방인>을 읽다가 주인공의 여자 친구 마리 Marie에게 마음을 내준것도 그렇고. 선생님인베티나가 실습 노트에 Marie라고 적는순간나는마리가 되었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마사지 자격증을 받고 무사 귀환하니 브런치 1년의 막이 내렸다. 내 이름 앞에 마리라는 새이름을 갖다 붙이고 2년째의 새날을 열기로 했다. 뭐가 됐든 새 출발이란 좋은 거니까. 뭔가 새로운 기분도 들었다.새인격을 부여받은 기분?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새자아에게 이름표를 달아준 기분?마사지 수업에서는 친구도 생겼다. 안드레아.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금방 친해진 친구. 27년간 미용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가을에는 안드레아와 로미 마사지 Lomi Massage라는 오일 마사지 코스도 같이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내게 마시지 코스를 시작하는 동기를 부여해준마사지 샵에서 근무하는 한국 친구와는 조만간 만나기로 했다. 마사지 가게 주인인 지인에게도내 말을했단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주겠다고. 무턱대고 소개만 해달라 조르긴 했으나 큰 기대는 하지않는다. 사람 일이란 게 어디서 첫 가닥이 풀릴지 모르는 법이라서.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다. 내 뜻대로만 된다면야 인생의 참맛을알 수가 있나. 적당한 반전과 역설과 아이러니가 양념처럼 배어야 진정한 인생일 테니까. 이름을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질까. 글쎄, 그런 마법은 알라딘에서나 가능하겠지. 다만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면 인생이 좀 가벼워 지기야 하겠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도 몇 사귀면 금상첨화. 이름이 있어야 나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