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을 여는 첫날. 독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아이와내가 탄 루프트한자 Lufthansa는 만석이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있었다. 좌석 앞에 붙은 개인 스크린으로영화를 감상하는 일. 덕분에 인천에서 뮌헨까지의 11시간을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이번에 본 영화는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쓴 메리 셸리 Mery Wollstonecraft Shelley(1797~1851)이야기. 드물게도 한국어로 더빙까지되어있었다! 세상에, 만 16세에 아버지의 제자이자 유부남이었던 낭만파 시인 셸리와사랑의 도피라는 말도 안 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18세에 이런 대작을 쓰기 시작. 갓 스물에 완성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된다! 그 사람이 메리 셸리라면.
그런데 이렇게 당돌하고 자존감 넘치는 아가씨를 보았나. 어린 나이에 사랑의 달고 시고 맵고 짠맛을 두루맛보고, 주사위를 던지듯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지고, 짧은 시간에 사랑의 영광과 사랑의 영락까지 동시에 경험한후그녀는말한다."내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에 상당한지분을 가진 천하의 바이런 마저 울고 갈 여성 아닌가. 그녀의 당당함. 그녀의자신감. 그녀의 책임감.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감함까지. 어떤 회피도 도피도 없다. 이 정도면 여자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 바이런 경의 별장!
아버지의 신뢰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책방의 책들도 한몫했다. 메리는 이 책을 아버지 고드윈에게 바쳤다. 사이가 나빴던 새엄마와의 관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지에도 공을 나누자. 제일 중요한 건 바이런 경의 별장으로의 초대. 사흘간 줄기차게 내린 비와 심심하니 귀신 이야기라도 해보자던 바이런의 제안의 결과물로도 볼 수 있겠다. 그 별장에서바이런의 주치의였던 존 폴리도리의 <드라큘라>와 메리의 <프랑켄슈탕인>이 동시에탄생하니까. 둘 다 자기 이름으로 출간되지는 못했다.드라큘라는 바이런의 작품으로, 프랑켄슈타인은 셸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존과 달리 메리는 이후 남편 셸리의 협조와 아버지의 도움으로 본인의 작품을 되찾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구적 아나키스트이자 급진주의 사회사상가였던 윌리엄 고드윈. 그녀의 어머니는 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교육자였던 메리 울스틴크래프트였다. 부창부수. 그녀가<여성의 권리옹호>라는 책을 낸 때가 무려 1792년. 그녀는 여성이 평등과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남녀 모두가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은 다 지워버리고 네 목소리를 찾으라."는 아버지 고드윈의 가르침에 딸은 이렇게 보답했다. "고통에 맞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나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을 거야." 메리로부터 전달된 울림은 컸다.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법. 나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저 여인에게서 <프랑켄슈타인> 탄생했다! (사진 출처: 네이버)
P.S. 메리 셸리의 남편이었던 낭만파 시인 P.B. 셸리는 아내 메리의 문학적 소양과 재능을 적극 후원했다.이태리의 라스페치아 La Spezia 부근에서 요트항해 중 폭풍을 만나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그의 시일부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