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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l 19. 2019

크리스토프와 마리온과 나

남편의 형과 형수님


지금은 안다. 내가 너무 예민했다는 것. 비록 충고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당시 형과 형수님의 마음과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도.
 


남편의 형과 형수님 이름은 크리스토프와 마리온. 두 사람을 안 지도 햇수로 20년째다. 결혼 전에 남편이 동경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 새어머니와 시아버지 그리고 형과 형수가 동경으로 여행을 왔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여자 친구로서 물 건너가 인사만 드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형과 형수님을 만난 것이. 형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고, 형수는 밝고 편안했다. 나는 처음 만날 때부터 두 사람이 좋았다. 벚꽃 피는 1999년도 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만하면 장래가 보장되던 직장을 그만두 남편이 있는 동경으로 다. 여름에 형과 형수님이 북부 독일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나도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그해 가을 형수는 딸을 낳았다. 그 아이가 벌써 대학에 입학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 무렵 형은 집 지을 땅을 사놓았다. 2년 뒤 우리가 독일에서 결혼무렵 형은 3층 집을 지었. 보기만 해도 따뜻한 벽난로, 마당에는 사방팔방 너른 정원이 있는 집이다. 부지런하신 장모님이 정원을 관리하셨다.


결혼을 하고 북부의 형네를 방문했다. 당시엔 우리 모두 젊었고, 이혼과 동시에 각각 재혼하신 양쪽 시부모님 네 분도 모두 정정하셨다. 화제가 시부모님 얘기로 옮겨가자 와인을 마시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돌연 무겁고 진지해졌다. 독일의 문화와 언어에 아직 익숙하지  나는 친시부모님보다는 그들의 두 배우자 새어머니와 양아버지가 어려웠다. 그분들과  보면 양날의 검처럼 교양과 뾰족한 콧대 사이에서 상처를 입었. 형은 초혼이었고, 동독 출신인 형수님은 재혼에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형수님도 나도 주류가 아닌 마이너리티였다.



그날 형과 형수님이 내게 당부한 말을 잊은 적이 없다. '잘 기억해. 네 가정을 지키고 싶으면 그 두 사람을 멀리해. 최대한 거리를 두고 사는 살아. 우리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찌 잊겠는가. 두 분 때문에 돌아서서 흘린 눈물이 얼만데. 어찌 그리 무정도 하신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신 건지 분의 뾰족한 말에 찔려  밤이 얼마던가. 지금은 안다. 내가 너무 예민했다는 것. 비록 충고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당시 형과 형수님마음과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도.


양아버지(아버님, 죄송해요. 오늘만 뒷담화 좀 할게요. 지금은 당신을 무척 좋아하는 거 아시죠?)께서 게스트룸창문 덧창 자동 장치가 고장 났을 때 손도 안 댄 내가 만진 탓이라고 단정하셨을 때. 너는 시어머니 집에 오면서 꽃도 한번 안 사 오냐고 지팡이를 흔들며 꾸지람을 하실 때. 시도 때도 없이 문학 작품과 작가와 음악가와 작품을 들먹이시며 그들의 이름과 제목을 아는지, 들어는 봤는지 고문하실 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데 왜 기억이 나지?


더 강력한 한 방은 언제나 새어머니(죄송해요,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께 아무런 나쁜 감정 없답니다.) 몫이었다. 조금만 친절하셨어도 지금쯤 레겐스부르크에서 함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독일로 오기 새어머니의 초대로 마지막 가족 스키 여행을 갔을 때. 출산 후 스키를 타지 않던 내가 산 위에서 가족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올라가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 너 보려고  거 아닌데.' 당연히 남편과 아이만 보고 싶으셨겠지. 그래도 그렇지. 같은 날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어머니가 날리신 최후의 한 방은 '개고기' 테마였다.



어머니는 우리가 독일로 오기 직전에 한국을 방문하실 계획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와 싱가포르와 한국을 묶어서. 결국 못 오시긴 했지만. 아무튼 그날 저녁 둥근 테이블의 저쪽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이야기가 한국 방문으로 옮겨갔다. 어머니가 예의 바르고도 우아하게 말씀하셨다. 그것도 웃으시며. '서울 가면 설마  개고기 집으로 초대하는 건 아니지?' 그날 밤도 울었다. 서러워서. 남편이 깰까 봐 욕실에서 울었는데 남편이 듣고 놀라서 달려왔다.


그날 저녁 원래 착한 형이 시어머니의 독화살을 맞은 내 몰골보고 장내를 수습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북독일엔 말도 먹고, 뭐도 먹고, 뭐도 먹는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수습이 어려웠다.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그날은 진짜 너무하셨어요. 다음날 아침 형이 정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레겐스부르크로 오면 어머니가 다 지원해 주신대요. 집도, 아이 골프도..' (이 대목에서 형의 안색이 변함.) '그래도  뮌헨으로  생각이고요..' (여전히 사색임.) 그때 알았다. 형이 부모님 유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것을!


그날 이후 형이 달라졌다. 새어머니를 집중 마크했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형과 형수님이 매일 왓쯔앱으로 새어머니께 연락을 했다. 여름에는 수년 동안 왕래가 없던 형수님과 아이가 새어머니를 방문하기도 했다. 내게는 신기했다. 서양 사람들의 부모님의 유산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발견한 셈이니까. 새어머니께는 다행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면 좋지. 덜 외로우시고. 아무튼 형은 이번에 자기 엄마한테 많이 났다. 최소 1년에 한 번은 코빼기라도 보여줘야 한다며. 저녁에는 형이 차로 뮌헨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이는 용돈까지 받고. 내년엔 호텔 말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낼 때다. 더 늦기 전에.


P.s. 그래서 20년  누가 승자가 되었을까? 소신대로 부모님을 안 보고 산 형네? 아님 그러지도 못하징징거리며 산 나? 한 가지 분명한 건 패자는 없다는 것. 형네가 다시 부모님과 소통을 시작하고 나 역시도 좋은 사이가 되었으니. 진정한 승자는 누구도 아닌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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