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방에서 우린 평등하다. 누구나 평등하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돈 벌러 나온 사람들. 그러니 서로 돕고 잘해 보자. 참으로 솔직하고 명쾌한 주방 철학이었다.
호텔 일을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났다. 어제는미나가 비스킷을 구워 왔다. 우리 아이에게 주고 싶다며. 세상에! 그렇게 일을 많이 하면서 언제 비스킷 같은 걸 굽나. 저런 사람이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어제도 미나는 뷔페에서 남은 미니 빵 하나에 치즈와 햄과 살라미를 넣어주었다. 우리 아이 갖다 주라고. 학교 마치면 배 고프지 않냐며. 당연히 그 시간에 아이는 배가 고프다. 지난번 미나가 싸 준 샌드위치를 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아이가 잘 먹더라는 얘기를 전해주자 미나의 표정이 얼마나 밝던지. 보통 남의 집 애 얘기는 재미없는데.
처음 미나를 보았을 땐 사람이 정신이 없었다. 매사에 허둥대는 타입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보는 사람까지 산만해진다고 할까. 어제는 왜 그렇게 동작이 빠르냐고 농담 삼아 물으니 겸면쩍게 웃으며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렇단다.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남편은 정반대란다. 집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해서 자기가 가사일을 다 한다고. 어쩌다 남편이 요리라도 할라치면하세월이 걸린다고도했다. 남편분 왈, 요리는 예술이고 창작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당연하단다. 미나 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배고파 쓰러질 것 같다고!
그건 그렇고, 호텔 주인 할머니가 아시면 경을 칠 일이라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다. 샌드위치를 싸가는 일 말이다. 얼마나 아끼고 절약해야 하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방을 들락거리며 잔소리를 하시는 분인데. 운이 없거나 타이밍이 안 맞아 할머니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독일 사람은 한번 찍히면 끝이다. 회복 불가. 그래도 맨날 하나 싸가라고 성화다. 내 참, 지나친 호의를 거절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그럼에도미나 같은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은 행운이다. 언제 뭘 물어도 짜증 내는 법이 없다. 귀찮은 내색 없이 잘 가르쳐준다.처음엔 물을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일 앞에 몸을 사리거나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스타일.그래서 일 복도 많은 사람.
어제 아침 미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렇다고 꽁해 있거나 뒤끝 있는 성격도 아니다. 자기 입으로 이유를 상세히 이야기해준다. 요즘 미나는 정오가 지나면 주방 일을 내게 넘기고 위층으로 룸 청소를 하러 간다. 룸 담당은 9년째 베트남에서 온 노흐가 맡고 있다. 그런데 노흐가 상사처럼 굴어서 기분이 나쁘단다. 한 마디로 텃세를 부린 것 같다. 우리 같으면 나이도 열 살이나 많고 한참 선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미나는 아닌 모양이다. 나 보고도 처음부터 한 말이 그 말이었다. 이 주방에서 우린 평등하다. 누구나 평등하다. 너도 나도.우리 모두 돈 벌러 나온 사람들. 그러니 서로 돕고 잘해 보자.
참으로 솔직하고 명쾌한 주방 철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시원시원한 말투와 활달한 몸놀림이 그녀의 철학과 잘 어울렸다. 어제는 마지막으로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중년의 프랑스 남자 두 사람과 프랑스 말로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렸다. 한참 지나 주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비 갠 뒤 하늘처럼 맑았다. 안 그렇겠나.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에 뜻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답답함.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떠드느라 한참 설거지가 밀린 시간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했다. '네가 손님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게 참 보기 좋다'라고 말해주자 미나가 내 볼에 키스하며 이렇게 답했다. '마리! 너와 일하게 되어 기뻐!'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리인데, 미나가 또 싫어하는 사람은 호텔 주인 할머니 프라우 코프나다. 가게 주인 좋아하는 알바생? 직장 상사 좋아하는 부하 직원 있나? 세상에 좋은 오너란 없다. 그게 내 알바 철학이다. 프라우 코프나가 그렇다. 아예 주방에 사신다고 보면 된다. 홀에서 들고 온 접시들이 주방에 쌓이면 가만히 못 보신다. 그릇을 헹구고, 식기 세척기에 넣고, 번쩍 들어내어 마른행주로 닦으신다. 미나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다. 어제는 보다 못해 내가 뼈 있는 농담 한 마디를 던졌다. '프라우 코프나! 자꾸 그러시면 저흰 일자리 잃겠는데요.' '그럴 리가.' 서로 웃음을 주고받고 끝. 내 철학에 따르면 이해 못 할 오너들의 행동이란 없다. 앞으로도 프라우 코프나의 행보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나의 미간도 자주 찌푸려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