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울프가 만한 대로. 클 필요도 없다. 울프에겐 울프의 방이, 내겐 나만의 방이 있다. 거기서 토마스 만과 체호프도 읽어야지. 새벽에 할 일이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
한국에서 독일학교에 다닐 때 이런 사람을 보았다. 우리 집처럼 한독 가정이었는데 아이가 둘인 한국 엄마였다. 우리 아이는 그 집의 둘째와 1년을 독일 유치원에 같이 다녔다. 그 집 아이들은 한국에서도 저녁 8시면 자러 갔는데 한국에 살다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한국의 저녁 8시는 초저녁 아닌가!더 특이한 것은 엄마도 아이들과 같은 시간에 잔다는 것. 그게 더 어렵지 않나. 더구나 한국에서. 독일도 아니고.
사정은 이러했다. 그 엄마의 취미는 서울의 재래시장 순례하기. 장도 재래시장에서 보는 편이었다. 낮에는 취미로 독일에서 계속하고 싶다며 민화를 배우러 다녔다. 그러니 그녀의 저녁은 얼마나 피곤했겠나. 저녁 8시 취침. 새벽 2시 기상. 그때부터 그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놓친 드라마도 챙겨보고, 민화도 그리고 기타 등등. 당시엔 그 소리를 듣고 기절할 듯 놀랐다. 그게 가능? 저녁 8시에 잠이 오나. 새벽 두 시에는 일어나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다른 엄마도 있었다. 일찍 자고 신새벽에 일어나 드라마를 본다는 사람 말이다. 그 엄마도 남편이 독일 사람이라 저녁에 드라마를 즐기기가어려웠던 모양이다. 새벽에 일어나는 유형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는 일찍 자도 일찍 못 일어난다는 남모르는 속사정이 있었고. 그런 루틴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뻔하면 재미가 있나. 내 삶이 준비한 반전은 이랬다. 새벽 알바 선택. 매우 피곤함. 일찍 잠. 글 쓸 시간 없음. 할 수 없이 신새벽에 일어남. 글 쓰고 출근하기.
어제는 새벽 4시. 오늘은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났다. 하루 이틀 일찍 일어났다고 새벽형인간으로 개조될 리 만무하다. 한 때는 그 시간에 일어나 독서도 했건만. 실제로 새벽 3시에 일어났더니 두 시간도 안 되어 급 피곤해졌다. 이건 아니지. 역시 답은 4시구나. 취침은 아홉 시. 하루키가 괜히 그 시간에 자고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 이른 새벽의 소득이다. 매일 글을 쓰듯 꾸준히 1년, 2년, 3년쯤 해야 몸에 익을 것이다. 오십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길 바라면 욕심이 지나친 것.
집에 침대 하나가 쏙 들어갈 만한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다는 건 축복이다. 새벽부터 독서등을 밝히며 배우자의 새벽잠을 방해할 수는 없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아이방과 마주 보고 있는 방. 원래는 붙박이 장과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던 방이었는데 붙박이장 문을 떼내고 그 밑으로 DIY 조립형 침대를 넣었더니 책 읽고 글 쓰는 방으로변신했다. 아이들 방에서 흔히 보듯 책장과 책상이 붙은 모양을 상상하면 되겠다. 처음엔 아이가 자기 방으로 하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시들해진 틈을 타서 내 차지가 되었다. 늦은 밤이나 한밤중 혹은 새벽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이 방의 주인은 나다.
자기만의 방. 울프가 만한 대로. 클 필요도 없다. 울프에겐 울프의 방이, 내겐 나만의 방이 있다.이러고도 글을 못 쓰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자. 그 방엔 긴 창문이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두꺼운 노란 커튼으로 바꿔달아야지. 창문 턱엔 아무것도 두지 말고 아끼는 시계 하나. 벼룩시장에서 득템 한. 좋아했던 친구 집에서 보았던 그 시계. 그리고 작은 부처님.저 창에 잠시 머물 햇살과 커피 한 잔. 그리고 책들. 시간이 많지 않다. 남은 날들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뿐.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충만한 삶. 거기서 토마스 만과 체호프도 읽어야지. 새벽에 할 일이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