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성적표만 공개하는 이유

그룬트슐레 2학년

by 뮌헨의 마리

6주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고민이다. 40여 일의 방학을 어떻게 보낸다? 보낼 학원도 없고, 구몬 같은 학습지도 없다. 독일에 와서 몇 번의 길고 짧은 방학을 보내본 결과, 초반에 아이와의 협상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마음 같아선 우리 어릴 때처럼 방학 계획표 세워! 그대로 따라 해! 이러면 젤 쉬운데 여기는 독일. 그게 안 통한다. 아이는 이미 자유로운 독일 마인드라 걸핏하면 소상하게 따지고 든다.

성적표를 예상외로 잘 받아온 것도 무작정 내 식대로 밀어붙일 수 없는 이유였다. 한국에 있을 때 아이의 독일어 성적은 별로였다. 내 입으로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 그러나 정작 아이의 자부심은 독일어에 있지 않았다. 산수는 상장까지 받았다며 자랑. 산수는 누굴 닮았지? 나는 아니다. 파파가 국어에 약했나?


방학하던 날 고모 바바라를 만났다.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하고 바바라의 회사 근처로 갔다. 무더운 정오였다. 성적표가 계속 궁금한 엄마 고모. 슬쩍 물으니 아이의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이를 어쩐다? 시어머니께서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실 텐데. 형의 딸인 첫 손녀 나탈리 성적표를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갖고 계신다며 학기 말에 우리도 복사해서 제출하라셨는데. 더운 날씨가 더 더워져 손부채를 했다.

비어가든에 자리를 잡자 아이가 성적표를 꺼내 들며 하는 말. 2가 두 개란다. 앗, 설마 나머지는 모두 333...??? 간이 떨어질 뻔했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 숫자 1은 언제나 좋다. 독일 점수에서도 마찬가지. 3은 김나지움 진학도 어렵게 만든다. 안 좋은 것부터 생각하는 건 엄마들의 전공. 아이가 말했다.

"나머지는 모두 1이야."


고모와 엄마가 환호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을 보며 아이가 말한다. 2를 두 개나 받았는데 뭐가 좋냐고. 그게 어때서! 고모는 2학년 때 이런 점수 받아 보았나요? 고모가 장단을 척척 맞추며 아니란다. 이런 성적표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며. 세상에, 내가 놀란 건 독일어 성적 1. 상으로 방학 내내 하루 1시간씩 아이패드를 보여줘도 될 만한 성취다. 아이들에겐 적절한 후포상도 중요하니까. 아이가 2를 받은 건 '종교'와 '만들기' 과목이었다.

서울 독일학교 시절 아이가 받은 3개의 성적표에는 독일어가 2에서 4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1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부담임던 카샤니 선생님이 우리가 떠나기 전 일부러 나를 학교 도서관으로 조용히 불렀겠는가. 요지는 알리시아의 독일어 이해 능력이 심하게 떨어져 학습 부진이 우려된다는 것. 해결책은 집에서 소리 내어 독일어 책을 많이 읽게 하라,였다. 부끄러웠다. 소위 책 읽고 글 쓰는 엄마인데.


성적표 사진을 당장 파파에게 보냈다. 할머니께 보내드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할머니께 엽서를 썼다. 엽서의 왼쪽에는 마멜라데와 할머니가 소포로 보내 주신 책을, 주소란인 오른쪽엔 두 문장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할머니께, 마멜라데랑 책 감사했어요! 곧 찾아뵐게요. 알리시아가."


방학 첫 주가 시작된 지 사흘. 아이는 글자가 촘촘하고 그림이 적은 독일어 책을 하루에 소리 내어 네 페이지씩 읽는다. 150페이지 분량의 책을 방학 동안 스스로 떼게 하는 게 목표다. 이런 성취감은 아이로 하여금 수시로 보는 독일어 시험의 짧은 지문을 시시하게 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므로 일석이조.
딜은? 1시간 동안 아이패드로 짱구 시청을 허락하노라. 오늘은 짱구가 보고 싶은 마음에이나 읽는 기염을 토했다. 협상에선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는 게 포인트. 내친김에 한글과 한자도 표 안 나게 끼워볼까 궁리 중인 엄마. 저녁에 새 할머니로부터 전화 칭찬까지 들은 아이의 기분은 고공행진 중. 할머니들께는 이번 학기 성적표부터 공개하는 걸로 아이와의 담합을 끝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