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서울 독일학교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한국계 입양 총각 선생님이 있었다. 한국말은 하지 못했다. 부교사였는데 아이들이 유난히 잘 따랐다. 한 번은 그와 이견이 생겼다. 아이가 유치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와서 한 살 많은 한국 여자 아이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게 화근이었다.
"아니카야, 운동장에 나갈 때는 알리시아 손을 잡고 같이 나가줄래?"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카에게 무슨 말을 했나요? 내가 대답하자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때 선생님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 사물을 저렇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 놀라웠다. 수긍도 갔다. 학부형인 내가 학교 질서에 개입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서울 독일학교는 12시에 유치원생들이 운동장에서 30분간 놀았다. 운동장이 작아서 점심시간 때는 초등부와 중고등부 학생들이 시간대를 달리 운동장을 사용해야 했다. 운동장 사용 시간은 급식실의 점심시간 스케줄과 같이 짜였다.
그때 우리는 학교 정문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아이는 한 학기 내내 유치원에 어울리지 못했다. 30분 동안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 때 우리 아이만 학교 철문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가슴 아팠다. 누구도 아이에게 관심도 말도 걸어주지 않았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안전에 주의를 집중했고, 아이들의 놀이 방식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아이의 몫이라 생각했다.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서운했다. 선생님들이 한 번이라도 등을 떠밀어 준다면 좋을 텐데. 손만 한번 잡아줘도 부끄러움을 극복할 용기가 날 텐데. 왜 독일학교는 그런 쪽으로는 무관심할까. 모든 아이들이 다 적극적이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데.
정교사 선생님은 젊은 독일 여선생님이었다. 야무지고 활동적이라 학부모에게 인기가 많았다. 상담 기간에 선생님께 물었다.
"저희 아이 같이 적극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조금 끌어주시면 안 되나요?"
대답은 안 된다,였다.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어조는 단호했다. 그건 독일학교의 교육 방침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말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침이길래.
"교사는 학생을 끌어주지 않습니다. 학생이 스스로 시작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저는 알리시아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해 주죠. 알리시아, 선생님은 언제나 여기 있단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네가 준비되면 언제든지 말하렴."
"하지만 선생님. 아이들은 다 다르잖아요. 저러다 한 학기 내내 적응을 못하면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다 다르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조금 빠르고 조금 늦을 뿐, 모든 아이들은 자기 템포대로 적응해 갑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아이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결론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안달복달하는 엄마가 문제라는 것. 본질은 맞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여전히 냉정하다는 생각을 다 떨치지는 못했다. 끝까지 적응 못하면 어떻게 되지?우리 군대 문화처럼. 군대에서도 끝까지 적응 못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늘 궁금했기에. 저런 태도가 남의 일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 가까운 사이라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는 문화의 바탕을 이룬 걸까. 독일의 합리성의 이면에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모호한 질문들을 잔뜩 안고 나는 올해 뮌헨으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