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무조건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날이었다.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는 침묵이 미덕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걸 잘 못했는데 첫 발을 뗀 셈이다. 그것이 호텔도 나도 성장하는 길이다.
호텔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겪게 된다. 주방이나 홀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와 손발이 안 맞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다행히 동료 미나와는 잘 지낸다. 불편한 손님과의 만남도피할 수 없다. 동료도손님도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손님과는시작과 끝이 있어서 좋다. 손님이 떠나면 상황 종료다. 가장 피곤한 일은 호텔과의불협화음이다. 합리적인 독일에서 합리성에 위배되는 일을 겪을 때. 목요일에 있었던 일이 그런 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동료 미나의 휴가였다. 손님은 매일 15명 정도. 혼자서도 대응이 가능한숫자였다. 대부분 비즈니스맨. 이런 사람들은 요구가 없다. 서비스에 대한 기대도 적고, 본인들이 바쁘니까다롭지도 않다. 두 팀이 눈에 띄었다. 젊은 이태리 남자 넷과 중년의 네덜란드 상인 넷. 이태리 팀은 20대였는데 어찌나 조용한지. 네덜란드 상인들은 활발하게 대화를 진행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네덜란드어가 신기했다. 주인 할머니의 농담으로는 독일어 반, 영어 반이라고.
수요일 아침이었다. 호텔 주인 아들이 이튿날인 목요일은 7시에 출근하라고 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7시면 조식 시작 시간 아닌가! 손님들이 7시에 내려오면 어떡하려고? 뷔페 준비에는 최소 30분이 걸린다. 그의 대답이 놀라웠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기다리게 하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이 아니었다. 주인 할머니에게 물으니 자기는 모른다. 아들 말대로 하란다. 설마알바 인건비 30분을 아끼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는 건가? 겨우 5유로에 호텔의 명성을 건다고? 불가사의란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호텔도 직원도 고객도 누구도 승자가 되지 않을 일을 왜 하려는 것인지.
다음날 아침 7시 전에 호텔에 출근하니주인 아들이 리셉션에 먼저 나와 있었다. 두 대의 커피 머신과 찻물 머신을 켜고, 오븐에 빵을 넣고 나자 벌써 7시. 뷔페 세팅은 시작도 못했는데 이태리 고객 4인이 여행 가방을 들고 리셉션으로 내려왔다. 아침을 먹은 후 곧바로 공항으로 출발한다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 보라! 냉장고에 준비된 음식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니! 음식은 받침대에 납작한 얼음을 깔고 내놓아야 한다. 빵도 못 구웠고, 커피도 내리는 중이었다. 그들을 위해 오믈렛부터 준비한다치자. 세팅은더 늦어지고 그 사이 다른 손님들까지 내려온다면?
호텔 꼭대기 층에 사시는 주인 할머니가 일찍 내려왔다. 할머니께 오믈렛 4인분을 부탁하고, 주문받은 커피와 카푸치노부터 준비했다. 이태리 손님들이 아침마다 요구르트를 먹던 게 생각났다.커피와 카푸치노와 요구르트부터 서빙했다. 그날 아침 내가 만난 건 천사 4인방이었다.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나에게 천사들이 괜찮다지 뭔가. 얼굴을 찡그리지도, 노여움도, 짜증도 없었다. 이런 귀인들이 있나! 덕분에 멘붕 없이 세팅을 마무리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았다.
주인 할머니에게 그날 내 수명이 1년은 줄었을 거라 했더니 큰소리로 웃으셨다. 농담이 아닌데. 할머니의 아들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그날 내 눈을 똑바로 못 보던건 미안해서였나. 다음날 아침 호텔 주인 딸에게 왓쯔 앱을 보냈다. '어제7시 출근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유감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용건은 짧고 명확했다. 곧바로 딸의 전화. 자기는 몰랐다고,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 앞으로그럴 때는 자기에게 먼저 연락을 하란다. 몰랐다는 게 더 놀라웠다. 지금도 미스터리다. 누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독일에서는 무조건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날이었다.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는 침묵이 미덕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걸 잘 못했는데 첫 발을 뗀 셈이다. 그것이 호텔도 나도 성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