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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4. 2019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새어머니가 주신 진주 목걸이


새어머니에게는 무언가를 주면 고맙게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사랑도 미움도 절망도 희망도.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가.



뮌헨의 중앙역 옆 알테 보테니컬 가든의 플레이 하우스. Spiel Haus.



그날 아침 레겐스부르크의 새어머니로부터 진주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다. 휴무가 시작되는 금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전날 오후 어머니를 방문했다. 호텔 일을 마친 후 오후 3시 45분 기차를 탔다. 뮌헨에서 레겐스부르크까지는 1시간 반이 걸렸다. 어머니가 차로 레겐스부르크 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바쁜 남편은 동행하지 못했다. 이제 남편이 없어도 괜찮다는 나도 놀랍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불쑥 말씀하셨다. '너, 진주 목걸이 없지? 하나 줄까? 돌아가신 친정 엄마한테 받은 것도 있고, 나도 몇 개 가지고 있거든.' 빵을 먹다 말고 어리둥절한 채로 내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  주시면 감사하죠!'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다. 그런 걸 주실 어머니도 아니고, 받을 나도 아니다. 세월이 흘러 좋은 게 있다면 그런 이다. 며느리 노릇 18년이면 이렇게 뻔뻔해지기도 하나 보다. 나이가 주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당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건 부인들이 저녁 식사에 성장을 할 때 걸면 딱 좋을, 누가 봐도 전형적인 진주 목걸이였다. 진주면 어떻고, 모조면 어떤가. 어차피 내게는 마찬가지였다. 목에 걸 일이 없을 테니까. 그날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본 건 진주 목걸이보다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이를 드셔서일까. 갑자기 무슨 진주 목걸이란 말인가. 어머니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목요일 레겐스부르크에 갈 때는 1박 2일을 생각하고 갔는데, 토요일까지 하루를 더 묵고 왔다. 그것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금요일 아침부터 하루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냐 몇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어머니가 외로우시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그날 오후 남편이 오면 저녁을 먹고 셋이 뮌헨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파파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는 10유로짜리 플레이 모빌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날씨도 계속 안 좋았다. 목요일은 춥고 흐렸는데, 금요일은 짙은 안개에 비까지 뿌렸다. 무슨 날이 그 모양인지. 아무리 오랜 세월 사이가 별로였던 사람이라 해도 그런 스산한 날씨 속에 혼자 내버려 두고 발걸음이 떨어질 리가 없다. 어머니도 그랬다. 미운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올해부터 어머니가 자꾸 깜빡하시는 걸 본 이후로. 분명히 남편이 목요일자고 금요일에 갈 거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그것도 잊으신 걸 보고는 더더욱.


이번에도 소소한 걸 기억하지 못하셨다. 전날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아이가 먹은 메뉴. 지난번 방문 때 우리가 함께 보았던 TV 프로그램. 어머니가 아이에게 주셨던 보라색 백팩도.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새어머니보다 젊은 나도 수시로 깜빡하니 꼭 치매 전조라고 볼 수는 없다. 아니길 바란다. 그럼에도 그토록 초롱초롱하셨던 분인데. 좋은 점도 있다. 어머니의 까칠함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편안하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아이는 가자는데, 내가 어머니 옆에 하루 더 있고 싶었을까.





어머니는 건축사셨던 본인의 친정아버지를 닮아 미적 감각이 뛰어나시다. 음식 솜씨는 나처럼 별로시고. 우리는 자주 나가서 먹는다. 나는 그게 좋다. 어머니는 뮤지엄 좋아하신다. 사진을 찍고 직접 현상하는 일도 오래 하셨다. 건축, 사진, 그림을 특히 좋아하신다. 그래서 보고 듣고 배울 게 많다. 아이가 할머니께 많이 배웠으면 좋겠다. 어머니와 저녁에는 TV를 보았다. 축구도 좋아하시고, 퀴즈 프로나 드라마도 즐겨 보신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 어머니와는 그런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침을 먹고는 아이가 좋아하는 카드놀이 우노 Uno도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숫자 게임도 했다. 토요일 아침엔 TV를 보며 매일 따라 하시는 모닝 체조도 셋이서 같이 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자꾸만 나와 아이의 겨울 잠바와 아이 부츠를 사주시겠다고 하셔서 감사히 받았다. 어머니께는 무언가를 주면 고맙게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사랑도 미움도 절망도 희망도. 새어머니께 받은 진주 목걸이도. 영원히 변치 않는 게 어딨나.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


뮌헨에 돌아오자 해가 나서 따뜻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해라도 자주 나와주면 좋으련만.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영화관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네덜란드 판화가인 에셔(M. C. Escher/ 1898-1972)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어머니의 친정아버지가 좋아하신 화가란다. 그 독창성이라니! 어머니는 뮌헨의 렌바흐 하우스 뮤지엄에도 가고 싶어 하셨는데. 우리 집인 콜럼버스 플라츠 역에 도착하자 렌바흐 하우스 뮤지엄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어머니, 다음에 뮌헨에 오시면 여기 같이 가요!' 어머니가 하트로 답을 주셨다. 요즘 날리시는 하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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