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도 슬퍼도 뮌헨이 집이라서

편지 47

by 뮌헨의 마리


한국은 전염병이라는 재난 앞에서 인류사에 남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기록을요.


날이 좋으면 요양원 정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저 예술적인 나무들의 자태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그리운 샘!

최근 들불처럼 번지는 유럽의 코로나 사태 때문에 걱정하실까봐 안부를 전합니다. 저는 잘 있습니다. 클레멘스와 알리시아도 집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고요. 한쪽은 재택근무, 한쪽은 휴교령이라 마치 홈스쿨링을 하는 기분이랍니다. 파파랑은 죽이 잘 맞는지 싸우지도 않네요. 저하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렸는데요. 둘을 집에 두고 새벽에 출근했다 오후에 퇴근하는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마음도 발걸음도 더 가볍겠지만요.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국행 비행기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가 봅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한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이제는 여기가 저의 집입니다. 기뻐도 슬퍼도 제가 살고 있는 뮌헨이 제가 살아갈 곳이지요. 지금도 앞으로도요. 이번 주부터 저는 풀타임 근무를 시작했어요.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 45분까지가 근무시간입니다. 퇴근 후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지요. 직장에서는 아침도 점심도 빵이라서요. 밥과 국과 김치와 김과 계란이 있는 밥상은 마법입니다.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이 나고, 용기를 거든요.





샘.

외출금지령이 내린 이번주 새벽 출근길 지하철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습니다. 오후의 퇴근길은 그보다 한산하고요. 요즘 지하철 풍경은 4인석에 한 명씩 앉는 추세로 바뀌고 있네요. 외출금지령 이후부터 마스크를 쓴 사람도 명씩 늘고 있고요. 독일은 손 씻기와 1~2m 거리 유지에 방점을 찍는 분위기에요. 마스크를 살 수도 없고, 살 곳도 없으니까요. 한국처럼 적극적으로 코로나와 정면대결 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어떤 의료진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달려가 주말도 없이 24시간 근무를 한단 말인가요. 마스크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지요. 개인의 삶이 공동체보다 중요하고 정책 결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서구 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진단 키트는 말할 것도 없지요. 정부가 나서서 신속히 승인하고 대처하는 시스템은 이곳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거기다 갑자기 어디서 그 많은 임시 병동을 만든단 말인가요. 그럴 만한 장소도 인력도 없고 설사 있다 해도 거기서 근무할 인력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지요. 이런 재난에 대처하는데 필수적인 신속성, 유연성, 순발력과 융통성이 한국보다 많이 떨어집니다. 사생활 침해라는 반대 여론을 넘지 못하기에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노출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이 점이 대단합니다. 이런 불편을 시민과 사회가 기꺼이 동의하고 감수한 대한민국이란 나라!) 그러므로 한국은 전염병이라는 재난 앞에서 인류사에 남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기록을요.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류를 괴롭힌 3대 재난을 기아, 역병, 전쟁으로 정리했지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는 이 세 가지 어려움을 이겨낸 후 신의 영역인 불멸, 행복, 신성으로의 진입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코로나가 보여주네요. 지구상의 기아도 전쟁도 현재 진행형이고요. 인류는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 대안을 유발 하라리는 한국의 코로나 대처에서 보았습니다.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과도하게 빼앗지 않는 선에서 넓은 테스트와 투명한 정보 공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한국'을 성공적인 사례로 언급하더군요.


새의 풍경


샘.

얼마 전에는 마스크를 쓴 40대 아랍계 여성에게 50대 독일 여성이 쏘아부치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마스크를 쓸 정도면 집구석에 얌전히 박혀있을 일이지 뭐하러 싸돌아다니냐' 는 뜻이었죠. 새벽 다섯 시 반에 생면부지의 독일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기분이 어땠을까요. 사람도 많은 지하철 안에서요. (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의 반응이 특이했어요. 얼굴을 붉히거나 못 들은 척하지 않고 '아하!' 하고 장단을 맞추더군요. 독일 여성은 다음 역에서 두 말 없이 내리고요. 저런 게 책에서만 보던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 여성의 용기에 힘 입어 저도 다음주부터 마스크를 쓸까 생각 중입니다. 고맙게도 정윤언니 조카가 귀국하기 전에 뮌헨에 와서 마스크 몇 개를 선물하고 갔거든요.


이번 주에는 한 편의 글도 못 썼습니다. 퇴근 후 밥을 먹고 나면 갑자기 몸도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웃 나라들의 코로나 소식에 마음도 무겁고요. 풀타임은 요양원 주방팀 동료들의 요청 때문이었답니다. 일이 힘들지 않아 바로 승락했어요. 이런 시기에 일할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죠. 저는 일하는 게 좋습니다. 몸을 움직이면 기운이 나거든요. 머릿속도 덜 복잡하고요. 몸도 가볍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는 건 축복이고요. 50대는 불면과 우울과 무기력과 만사가 귀찮고 짜증나기 쉬운 나이지요. 거기다 몸까지 아프면 더 괴롭고요. 다행히 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늘도 새벽 네 시 반에 잠을 깼어요. 알람이 울리려면 아직 십오 분이나 남았는데요. 습관의 힘이란 대단합니다. 오늘부터 마음을 추스려 다시 글을 씁니다. 언제나 첫 글은 샘의 편지로 시작하지요. 2년 전 한글학교 앞 카페 디바에 앉아 첫 편지를 쓰던 날처럼요.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강건하게 버티셔야 해요.



한국에서 날아온 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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