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쓰다 그러나 열매는.. 모르겠다

요양원 주방 3

by 뮌헨의 마리


인생이 쓰다고 느낄 때 뜨거운 초록티를 마시며 든 생각. 한 번 마음을 주면 푹 잠겨야 하는구나. 뜨겁다고 몸을 사리면 안 되는구나. 상처는 그럴 때 입는 것이다.


요양원 옆 성당의 창문.



이번 주는 날씨가 추웠다. 오월 중순인데 낮 기온이 11도에서 13도 사이를 오락가락했으니까. 오늘은 해가 나왔다. 기온도 올랐다.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5일째 근무 중이다. 월요일인 내일이 휴무인데, 날짜가 바뀌어서 일까지 일해야 한다. 이번 주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아마도 이번 주 근무조가 최악이어서. 어제는 바닥을 쳤다. 60세 터키인 귤헨 할머니 때문에. (60세가 왜 할머니? 미워서 그런다!)


다른 두 명의 동료는 50대 중반 터키인 쿠키와 이제 막 오십 대에 진입한 알바니아인 미라가 있다. 귤헨 할머니와 같은 근무조가 되기 전 이틀 동안은 셋이 일했는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일하면서 수시로 잡담을 했고,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모르는 것은 맘 놓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미라가 나보고 말을 많이 하라고 해서 노력도 했다. 내 업무를 익히느라 말할 시간도, 그럴 여유도 적은데도.


그날 미라가 물었다. 여기서 일하는 게 어떠냐고, 좋냐고. 내가 망설이지 않고 좋다고, 그것도 너무 좋다고 한 게 화요일의 일이다. 대답과 함께 내가 활짝 웃자 두 사람도 따라 웃었다. 마스크도 눈이 웃는 것을 가리지는 못했다. 믿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사월은 한 달 내내 귤헨 할머니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그들이라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냉랭하던 두 사람이 할머니 몰래 나를 도와주기 시작한 것도.


나의 힐링센터. 나의 아쉬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박대를 하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실수를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을 퍼붓지만 할 말은 없다. 내 실수가 팩트라서. 예를 들면? 기억도 안 난다. 하도 혼을 빼놓기에. 눈물도 진땀도 함께. 토마토 샐러드 사건은 말할 수 있다. 런치 메뉴인 토마토 샐러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한 번도 안 해 봤으니 모르지. 알고 나면 쉽다. 잘라놓은 토마토를 켜켜이 놓고 샐러드드레싱과 잘게 썬 양파와 잘게 썬 파슬리를 듬뿍 뿌리면 된다. 드레싱이 없으면 오일과 소금, 후추로 대충 섞으면 끝.


시작은 토마토를 왜 전날 카트에 안 챙겨놓았냐부터. 샐러드용 토마토는 오늘 아침에 온다고 들은 거 같은데요. 누가 그랬는데? 아마도 쿠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슬 푸르게 돌아서서 쿠키에게 가심. 터키 말로 블라블라. 득의만만하게 돌아오심. 연발 수류탄도 함께!) 쿠키가 안 그랬다는데.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전날 재료를 챙겨놓으라고! 본방도 토마토 샐러드. 처음이지? 뭐든 모르면 처음이라고 오리발 내미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냐. 두 달씩이나 됐는데,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없어. 모르면 적어서 외우라고! (토마토 샐러드는 처음 맞는데. 매일 적고 있고.)


재생 녹음기도 아니고. 이걸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 45분까지 돌린다고 생각해 보라. 토마토든 감자든 당근이든 뭐가 됐든, 레퍼토리는 똑같다. 진짜로 돈다. 할머니가 머리도 좋고 눈치도 백 단이라 일하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계신다. 그리고 방심할 때 치고 들어온다. 치즈 종류가 얼마나 많은 지는 여기 와서 알았다. 햄과 살라미 이름은 어떻고. 버터치즈 Butterkäse 는 뭐며, 맥주햄 Bierschinken 은 뭔가. 어제는 일하는 게 느리다고 불평을 들으며 300개나 되는 후식을 혼자서 준비했다. 할머니는 쿠키랑 담배 피우러 가시고. 이런 건 보통 다 같이 하는데. 그럴 때 누구는 새들도 날아와 돕던데.





매일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면 죽는다. 이 할머니와 같은 조로 묶이는 불운한 날에 겪는 고초다. 우리 팀 직원은 다섯 명. 매일 3인조로 일하는데 할머니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녀를 보며 드는 생각.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지기가 어려울까. 인생이 그리도 불만족일까. 그런데 그걸 왜 남한테 풀지. 이런 날엔 진정제 쓰리 세트가 필요하다. 1번. 퇴근길 성당 옆 야외 테이블. 책은 읽지 않는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리는 바람소리.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놀이. 나무 탁자 위로 떨어지는 작고 작은 꽃들의 최후. 그걸 해독하는데 삼십 분이 걸린다.


2번. 뜨거운 닭국물. 서양식 미지근한 치킨 수프 말고 오리지널 닭국물 말이다. 하루 전날 압력솥에 닭다리 3개. 오래 뭉근히 끓인 노란 기름 뜨는 닭국만 한 어디 있다고. 왜 치킨 수프 앞에 '내 영혼의'란 수식어가 붙는지 금방 알게 된다. 한국 슈퍼에서 사 온 비비고 열무김치 맛은 또 어떻고! 뜨거운 닭국에 뜨끈한 쌀밥을 넣고 그 위에 열무김치를 올려서 먹어보라. 어떤 맛이 더 필요한가. 산해진미가 왜 부러운가. 할머니와 함께 한 5일은 너무 길더라. 오늘은 잘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한 채 출근했다. 살아 돌아왔다.


3번. 퇴근길에 마트에서 산 민트도 열 일 했다. 인생이 쓰다고 느낄 때 뜨거운 초록티를 마시며 든 생각. 한 번 마음을 주면 푹 잠겨야 하는구나. 뜨겁다고 몸을 사리면 안 되는구나. 상처는 그럴 때 입는 것이다. 사랑을 해서가 아니라 못 하거나 안 해서. 물 밖으로 나오니 검게 멍이 드는 저 잎처럼. 어찌 되었건, 인생은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정말로 달까? 모르겠다. 인생 대차대조표는 70쯤 되어야 나온다고 믿고, 오늘은 차만 마시자. 프레쉬 민트티는 뜨겁게, 뜨겁게. 녹차처럼 마시지 말고.



초록은 왜 멍드는가. 민트티를 마시며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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