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다

요양원 주방 4

by 뮌헨의 마리



남편에게도 동료이자 친구가 생겼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나. 어떻게 가족만 보고 사나. 일도 있고,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취미도 있어야지.



요양원 휴게실(위)과 주방(아래) 창문에 봄꽃이 필 때. 저 때가 사월이었다. 지금은 꽃은 지고 초록만 남았다.



남편이 좋은 사람이냐고 질문을 던진 동료의 이름은 귤헨. 터키, 육십 세, 여자분. 최근 내 글에 등장한 주인공이다. 우리 요양원 근무 기간만 햇수로 30년 째다. 지금까지 남편에 관한 같은 질문만 세 번. 뮌헨의 내가 사는 지역과 집 평수, 세금 등급에 대해서도 한 번씩. 터키가 한국전쟁 때 우방국이었다. 터키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다. 그걸 아느냐는 질문은 두 번. 솔직히 몰랐다. 그럼에도 안다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당신 남편도 좋은 사람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내게 히스테리를 퍼붓고 나면 자기도 너무 심했다 싶은지 슬그머니 다가와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기에. 살면서 자기도 할 만큼 다 경험해 봤다고. 무엇을?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실수를. 그 실수 안에는 결혼이나 남편도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인텔리셨는지 터키에 살 때는 집에 책이 몇천 권이나 되었다고.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을 아는지도 물었다. 한국에서도 유명하다고 답했다. 만 19세. 꽃피는 청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때 군부독재 정권을 피해 독일로 이민을 왔다고. 이후 공부의 길을 계속 지는 못하신 듯하다.


이번에 귤헨과는 총 6일을 근무했다. 4일째에 최악의 날을 보낸 후 나머지 이틀은 평화로웠다. 5일째에 그녀가 나에게 휴무일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6일째에는 교환이 아니라 내 휴무일 중 하루를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어쩐지! 이틀 동안 친절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구나. 나로서도 나쁜 딜은 아니었다. 5월 근무 일수가 너무 적었고 (시간제 근무라 일한 만큼 받는다), 귤헨만 없으면 누구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없을 때 최대한 일을 많이 배워야 하는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었다. 일이고 공부고 사랑이고 왕도가 있나. 잘할 때까지 하고 또 하는 수밖에.



사월의 요양원 정원 풍경. 오월 중순도 지난 지금은 얼마나 울창해졌는지.



주방에는 또 한 명의 터키 여자분이 있다. 그녀의 본명은 쿠툴루라. 우리는 그녀를 쿠키라 부른다. 쿠키는 한류 드라마 마니아다. 처음 내가 일하러 갔을 때 그녀가 놀라는 걸 보고 내가 더 놀랐다. 그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한국 사람을 처음 봐서 (아님 너무 달라서?). 나는 한류 아줌마 외국 팬을 처음 봐서. 운이 좋았다. 살면서 한류 덕을 볼 줄이야. 그것도 독일에서 보지도 않는 한국 드라마 덕분에. 그녀 역시 말랑한 성격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래도 나는 잔소리 안 하는 쿠키가 좋다. 57세. 요양원 근무 경력은 20년. 그녀의 한류 최애 남주는 공유! (, 다행이다. 난 예나 지금이나 정우성! 보고 싶은 그의 영화는 <호우시절>) 향후 나의 미션은 드라마에서만 보고 직접 먹어보지는 못했다는 쿠키에게 오리지널 김치를 선보이기.


알바니아 출신 미라도 있다.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 퉁퉁한 쿠키와 달리 단단하고 튼튼한 몸매의 소유자. 올해 오십이 되었다. 주방원 근무 15년. 본인 말로는 젊어서 당근, 감자, 오이, 토마토 등 20킬로 포대 자루를 너무 많이 들고 나른 결과 허리가 안 좋다. 매일 허리 보호대를 하고 출근함. 외모만 보면 까칠할 거 같은데 알고 보면 하나도 안 예민하다. 성격이 급하고 말도 급해서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 요즘은 라마단 기간이라 점심을 안 먹는다. 일하다가 혹은 지나다가 갑자기 뒤에 와서 간지럼을 태우거나 애들처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요즘은 제발 입도 열고 말을 좀 하라고 내게 말도 안 되는 압력을 넣기도 하는데. 머릿속이 바빠서 말할 여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사흘이었던 휴무는 그렇게 하루를 양보하고 결국 주말로 줄었다. 그래도 괜찮다. 귤헨이 없는 동안 미라와 같은 조로 일했으니까. 스트레스 없이. 남편은 좋은 사람이냐는 귤헨의 질문에 답은 했냐고? 물론 했다. 좋다고, 아주 좋다고. 그러니까 또 물으시네. 돈은 잘 버냐고. 네? 돈요? 아, 돈은.. 아직 그렇게 많이 벌지는 못.. 대체 뭘 하는데? 1인 사업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돼서요. 무슨 사업? 기계 같은 걸 만들어요. ('AI 분야'라고는 안 밝혔다!) 그러자 이어지는 귤헨의 혼잣말. 그 동네 비싼데.. 결국 월세까지 털렸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깎아서 대답했다. 금액을 듣고 혼절 직전. 절반으로 깎았어야 했나?



휴무날의 진수성찬의 주인공은 과일과 크라상!



휴무 첫날. 주말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남편은 최근에 함께 일하게 된 동료와 영화를 본다고 동료의 집으로 갔다가 늦게 온 듯하다. 맥주도 마시고, 일 얘기도 하고, 카우보이와 SF를 믹스했다는 영화도 봤겠지. 뮌헨에 온 지 3년. 주말도 없이 친구도 없이 동료도 없이 일만 하던 남편이었다. 드디어 그에게도 동료이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나. 어떻게 가족만 보고 사나. 일도 있고,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취미도 있어야지. 어젯밤 나는 영화를 보던 아이 옆에서 글을 쓰다가 졸다가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 6시 30분. 알람을 꺼놓고 평소보다 2시간을 더 잤더니 머리가 맑았다. 가장 먼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식 기사를 찾아읽었다. 그날을 기억한다. 싱가포르에서 비운의 소식을 접하던 그날을. 오늘을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이 정갈하고 특별한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어젯밤 외출을 허락해주어 고맙다는 뜻이겠지. 오늘 아침 뮌헨의 날씨는 흐렸다. 오후에는 소나기성 폭우까지. 그러나 저 회색빛 구름 뒤에 태양이 있음을 안다. 오늘 하루 흐리다고 내일 하루 맑다고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 절망 뒤엔 희망이! 11년이 지나고 그가 바라던 희망의 나라가 건설 중이므로. 사월의 연둣빛 요양원 정원이 오월의 짙은 녹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오월의 요양원 정원. 5월부터 요양원 방문이 허락되었다. 단 만남은 야외 정원에서! (외부인의 실내 입장은 아직도 사절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생은 쓰다 그러나 열매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