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베르크는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지 않아 중세 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과 운하를 따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작은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그 도시에 모래 사나이 호프만이 살았다.
밤베르크 시청(위/아래 좌우)와 밤베르크 운하
밤베르크 Bamberg에 다녀왔다. 록다운 첫 주말이었다. 날씨마저 안성맞춤이었다. E.T.A. 호프만. 그의 <모래 사나이 Der Sandmann>를 읽은 날로부터 몇 해가 흘렀나. 뮌헨에 도착한 첫 해에 겁도 없이 <모래 사나이> 원문을 손에 들었다가 던져버린 기억이 난다. 무슨 문장이 그리 길던지! 18세기 작가 호프만은 1776년 1월생이다. <모래 사나이>를 집필할 때 그의 나이 만 39세, 우리 나이로 마흔이었다. 그가 이 단편을 쓸 때도, 내가 밤베르크를 방문할 때도 같은 11월이었다. 11월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좋은 날 다 놔두고 록다운에 밤베르크를 갔을까. 이번에도 친구 따라 강남 간 케이스였다. 지난 금요일 저녁 내 브런치 글이 어딘가에 떴다고 친절하게 알려준 건 뮌헨의 현경네였다. 아이는 친구 집에 가고 없었다. 다음 날 한글학교 수업 여부를 묻던 현경네가 한글학교 수업이 없다고 하자 함께 어디론가 떠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왜 없겠는가. 친절하게도 가고 싶은 곳까지 물어주었다. 멀리 갈 수도 없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밤베르크. 묵은 편지를 들고 옛 연인의 흔적을 찾듯 호프만을 찾아 나섰다. 출발은 토요일 오전 11시.
밤베르크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다. 인구는 7만. 2차 세계대전 때 드물게 파괴되지 않아서 특히 아름답다. 도시 전체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시청 위치도 특이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레그니츠 강 가운데에 있다. 대성당과 가톨릭 주교가 살던 궁전쪽과 일반 시민들이 살던 반대쪽이 서로 시청을 짓겠다고 나서자 어쩔 수 없이 강 한가운데에 짓게 되었다. 강과 운하를 따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독일의 베니스' 혹은 '작은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놀란 건 우리 말고도 독일 관광객들이 제법 있더라는 것. 밤베르크는 가게 안이든 밖이든 모든 곳에서 마스크 필수.도시락 지참. 다른 사람들과 거리두기 노력함.)
호프만의 동상과 호프만 하우스(아래 오른쪽/세 채 중 가운데 집!).
호프만은 밤베르크에서 5년 가까이 살았다. 좁고 높은 그의 집은 현재 호프만 하우스* 가 되었다. 실러 광장 26번지 Schillerplatz. 그는 이 집의 3층과 꼭대기 옥탑방을 사용했다. 이 집에 살며 대체로 만족한 편이었다. 맞은편 호프만 광장에는 호프만 극장과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의 주인공 고양이 무어 Murr를 어깨에 올린 호프만 동상과 만날 수 있다. 호프만 하우스는 록다운 직전에 문을 닫았다. 연중 개관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밤베르크에 <호프만의 길>도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내년에 다시 와서 걸어보고 싶은 길. 밤베르크에 있는 7개의 언덕과 그 언덕 위의 성당들도. 호프만은 1808년 구월에 와서, 1813년 사월에 밤베르크를 떠났다.
호프만이 밤베르크로 올 때 사랑의 광기에 휩싸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밤베르크에 온 다음 해였다. 유부남인 호프만의 나이 만 33세, 성악과 피아노를 가르치던 소녀 율리아 마르크 Julia Mark는 만 13세였다. 일기에 자살 충동을 내비칠 만큼 과도했던 그의 열정은 보상받지 못했다. 3년 후 영사 미망인이었던 율리아의 어머니가 서둘러 딸을 결혼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율리아 가족의 야유회에서 만취한 호프만이 율리아의 남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던짐으로써 다시는 그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스스로도 제어하기 힘든 불가해하고 광폭했던 격정은 그의 작품 <모래 사나이>의 나다나엘, <황금 항아리>의 안젤무스, <악마의 묘약>의 메다르두스에게 생생하게 투사되었다. 율리아의 가족 마르크 일가가 살았던 집은 랑게 슈트라세 13번지.
베를린의 고등법원 고문관이었던 호프만은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입성으로 관직을 잃고 밤베르크로 왔다. 작가이고 시인이자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예술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1808년 밤베르크의 교회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이후 극단의 작곡가로도 일했다. 모차르트를 경외한 나머지 자신의 미들 네임 중 하나인 빌헬름을 '아마데우스'로 바꾸어 우리가 아는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 E.T.A. Hoffmann이 되었다. 그는 또한 베토벤의 열렬한 숭배자이기도 했다. 밤베르크 시절 <황금 항아리>와 <악마의 묘약>를 집필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두까기 인형>. 만 46세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구술로써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신궁전의 로젠 가르텐(위) 로젠 가르텐 담장에서 바라본 밤베르크 전경(아래)
구시가지의 언덕 위에는 대성당, 대성당 옆에는 소박한 구궁전이 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맞은편의 웅대한 신궁전은 국립 도서관과 국립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신궁전 안뜰에는 장미 정원. 질서 정연하게 정돈된 로젠 가르텐이 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정원의 돌담 너머로 단정한 밤베르크의 전경이 압권이다. 궁전에는 가톨릭 주교가 살았다. 100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이 지역을 주교령으로 만든 후 주교들이 지배했다. 하인리히 2세는 사후 밤베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흑역사도 있다. 17세기 마녀 재판과 관련 1,000여 명이 처형되었다. 1627년 세워진 마녀 감옥은 없어지고 일부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언덕길을 오르면 수도원이었던 성 미하엘 성당이 있다. 현경 아빠가 아니었다면 못 볼 뻔했다. 오후 5시도 되기 전에 날이 어두워져 잠시 헤맬 때 그의 사교성이 빛났다. 친절한 중년 독일 남성의 안내로 수도원을 찾았다. 성당 건물은 보수 중이었다. 어두운 중세 수도원의 담장을 따라 걷는 일은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과도 비슷했다. 수도원은 넓었다. 마스크를 쓴 독일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 수도원의 낮은 담장 아래 밤베르크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일은 얼마나 평화롭고 평온하던지. 밤베르크의 거리와 골목길도 좋았다. 귀족적이라 할까. 건물들의 우아한 외관과 차분한 건물 빛깔에는 품격이 배어있었다. 저물어가는 늦가을이 중세 도시에 고즈넉함을 더해주었다.
대성당 광장(위/왼쪽) 수도원이었던 성 미하엘 성당(위/오른쪽) 성 미하엘 성당 뒤편에서 바라본 풍경(아래)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는 11월의 카페에서 읽기 좋은 단편이다. 지퍼나 외투 깃을 목까지 올리고덕수궁 돌담과 정동길을 걷다가 눈에 띄는 아무카페나 뛰어들어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후에. 분량도 착해서 1시간이면 충분하다. 장담하건대 책을 덮을 무렵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을 것이다.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띄우는 편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커피의 존재마저 잊고 말 테니까. '너무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아 모두들 걱정하고 있겠지..(중략).. 내 삶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 나를 위협하는 무서운 운명의 어두운 예감이 따스한 한줄기 햇살도 꿰뚫을 수 없는 검은 구름 그림자처럼 나를 내리누르고 있어.'
어떤 일인지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인간의 광기와 기괴하고 무서운 사건, 인간을 파괴하는 불가해한 힘을 소재로 한다'***는 것만 밝혀두겠다. 그렇다고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만큼 그로테스크하지는 않다. 마지막 순간에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가슴이 찢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시길. 카페를 나올 때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광기가 밖으로 새 나오지 않도록 외투를 꼭꼭 여밀 것. 뮌헨을 출발할 때 고속도로를 뒤덮던 안개는 밤베르크를 떠날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 차창에 하얀 베일을 드리우며 말 없는 작별을 고했다. 인생이란 게그런베일이 아닐까 싶었다. 힘겹게 하나를 걷어내면 또 다른 베일이 겹겹으로 눈 앞을 흐리고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밤베르크 시청 야경(위) 성 미하엘 성당에서 대성당으로 내려오는 길(가운데) 밤베르크 저녁 풍경(아래/좌우)
*호프만 하우스 E.T.A.-Hoffmann-Haus의 연중 오픈 일정은 5/1-11/1이다. (관람 시간은 오후 1시-5시/입장료는 5유로/어린이, 노약자는 2.50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