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들을 좋아한다. 책에 파묻혀 지내거나, 영화에 푹 빠져 지내거나, 하루 종일 음악을 듣거나, 미드를 시즌제 별로 모두 돌파한다던가...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무언가에 푹 빠져지내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요즘에는 책에 푹 빠져지내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질 때, 시간 속에서 사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글을 쓰고 그 글을 퇴고하고, 읽으면 마치 내가 영겁의 시간 속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감들로 글을 다시 끄적이고 있다.
내 인생의 첫 영화는 극장에서 보았던 ‘쉬리’였다. 그리고 10대 시절에 보았지만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영화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로 그 잔잔한 여운에 영화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난다.
<러브레터>는 오타루의 하얀 설원에서 펼쳐지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영화는 여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으며 시작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학창 시절 동명이인으로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의 전 연인 와타나베 히로코. 2년 전 조난 사고로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잃은 와타나베 히로코는 그를 잊지 못하고 그의 옛날 주소로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돌고 돌아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이후, 그 둘은 편지를 주고받는데, 와타나베 히로코는 죽은 전 연인의 첫사랑으로부터 그의 과거를 공유받으며,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전 연인의 빈자리를 후지이 이츠키와의 편지를 통해 극복해 나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편집과 여주인공이 1인 2역을 한다는 점, 남자 주인공은 현재의 신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존재감이 크다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었다. 무엇보다, 러브레터의 ost 중 ‘winter story’를 좋아해서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심취해서 곡을 연주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영화 속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했던 와타나베 히로코가 하얀 설원에서 그의 연인이 조난을 당해 돌아오지 못한 산을 향해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 데스.”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은 어떤 것 일지...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할지...궁금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는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어른이 된 지금은 지나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남기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그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것을 안다. 또한, 상처가 아문자리에는 흉터가 남지만, 시간이 준 선물로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 흉터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 또한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연인이 떠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잊지 못하는 마음, 사랑의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의지가 담긴 시를 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