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했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워라밸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지내왔기에 일이 많은 곳은 피해왔었다. 거의 야근을 하지 않는 나에게 여동생은 “변호사가 왜이렇게 한가해?” 라고 말하곤 했었다. 지금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업무 로드가 과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지만, 직주근접이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껴 이직을 단행?하였다.
한동안, 아니 아직도 매일 같이 의뢰인들에게 시달리며, 쏟아지는 업무들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다. 과도한 업무량에 그리고 매일 수많은 연락을 하는 의뢰인들에게 시달리다보면, 나 역시도 스트레스에 견디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민감해질때가 있다. 스스로 민감해졌다는 생각이 들때면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곤한다. 그리고 둔감해지려고 스스로 노력을 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속도가 빠르다. 기술의 발전도, 유행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한다. 정보는 넘쳐나고, 빠른 속도와 발전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자연속에서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추구하던 월든의 소로우와는 정반대의 삶을살고 있는 것이다. 무던함, 덤덤함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던 와중에 문득 집어든 이기주의 ‘인문학 산책’에서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있어서 그 글귀들을 필사하며 일에 치여 퍽퍽해진 나의 마음을 정화시켰다.
이기주의 '인문학 산책'
#1
“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숨막히는 세상이다. 정제되지 않은 예리한 말의 파편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우리의 마음을 긁고 할퀸다. 이같이 난잡한 세상에서 허덕지덕 힘겹게 버티다 보면 헷갈리는게 있다. 날카로운 언어의 창이 우리를 겨눌 때 촉수를 곤두세우며 예민하게 대응해야 할까, 아니면 외부적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하며 무덤덤하게 임해야 할까.
소설<실낙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런고민에 휩싸인 이들에게 ”둔감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에 힘을 뜻하는 역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자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가깝습니다.”
여기서 ‘후’는 얼굴이 남보다 두터워 감정을 쉽게 들키지 않음을 뜻한다. ‘흑’은 글자 그대로 검은 것이다. 그냥 검은게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새까맣다는 의미다. 일부에선 후흑을 ‘뻔뻔함’정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최근 이를 연구한 학자 달은 ‘무디고 둔감한 감정이 지닌 힘’ 혹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서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역량’으로 풀이한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조언과 결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2
둔감력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마음의 근력 또는 힘을 의미하는 ‘회복탄력성’같은 단어와 어감이 묘하게 겹쳐진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의 말은 물을 닮았다. 천천히 흐르면서 메마른 대화에 습기를 공급하고 뜨거운 감정을 식혀준다. 언행과 행실에 수기가 깃들었다고 할까. 그런 언어는 내 귀로 쉽게 흘러들어오고, 그런 행동은 내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진다. 무협 영화를 보면, 고수는 소리 없이 강하지만 하수는 소란스럽다. 하수는 적을 발견하는 순간 주저 없이 칼을 내두른다.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애매하게 진격한다. 그러면서 전력을 쉽게 노출하고 늘 싸움에서 패배한다.
무릇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 무작정 꺼내 들면 칼의 위력은 줄어든다. 칼의 크기와 날카로움이 뻔히 드러나는 탓이다. 아마 말도 그러할 것이다. 적절한 둔감력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휘두를 때 말의 품격은 더해지며 언력은 배가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지만 삶은 매번 계속되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사소한 일로 마음이 틀어진 이들과 다시 말을 섞고 몸을 부대끼려면 우린 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계속 달릴 수만은 없다.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반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의미에 둔감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