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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반향초 Feb 01. 2022

필사 노트 26-채사장의 '열한 계단'




책을 좋아하지만 넷플릭스에 흠뻑 취해 손에 땀을 쥐면서 시청하다가 현실로 돌아와 책을 펼쳐들고 문장들을 정리하는 일은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한다. 노트북을 켜고 앉아서 글자를 적어내려가는 나를 셀프로 칭찬해주어야겠다 (사실 초콜릿 상자에서 다 먹은 줄 알았던 헤이즐넛맛  킷캣을 찾아 기분이 좀  좋은상태다).


어서 문장들을 정리해서 음미(?)한 후 넷플릭스 앞으로 돌아가야겠다!






아래는 '지대넓얇' 시리즈, '우리는 모두 만난다' 등의 작가로 유명한 채사장의 '열한계단'의 문장들이다. 채사장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의문과 사유에 중점적으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1.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항해하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물론 가끔은 미디어에 비친 유명인들의 화려한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고독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시간과 마주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임을 말이다.




2. 나를 불편하게 한 지식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열한 개의 고전을 선택했다. 다음으로 이러한 인류의 오랜 지혜가 어떻게 한 명의 구체적인 개인을 성장시켰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이를 위해 나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결과적으로 《열한 계단》은 인류의 고전을 개인의 성장기와 연결시킨 ‘인문학적 수필’의 형식을 갖게 되었다.




3. 하지만 문학은 달랐다.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국문과에 가지 않으면 나의 삶이 망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내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어린 나는 그렇게 믿었다.




4.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동시에 세계문학을 읽어갔다. 《전쟁과 평화》, 《이방인》, 《폭풍의 언덕》,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등.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문학의 숲을 헤매었다.




5.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걸까?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왜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소설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매일 풀고 답을 맞히는 수학 문제처럼 정확한 정답이 있기를 바랐다.




6. 나는 불만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지하철의 승강장은 고요하고,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복음서 안의 가르침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말씀이 가득한데, 왜 그리스도교가 점령한 이 세계는 가난하고 구차한 삶으로 가득하단 말인가? 고통 속에 놓인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물어야 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7. 가끔은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을 피해서 골목을 돌고 돌아 집으로 가곤 했다. 주황색 가로등에 물든 고요한 거리를 걷는 게 좋았다. 멀리 돌아가는 그 길에는 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좁은 장소가 하나 있었다. 가끔은 그곳에서 한참을 서서 서울의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재수 생활도, 집안 살림의 어려움도, 성서 속의 질문들도 곧바로 얻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8.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걸까?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왜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소설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매일 풀고 답을 맞히는 수학 문제처럼 정확한 정답이 있기를 바랐다.





9.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맑은 정신 속에서 나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인생 전체를 조망한 느낌. 아름다운 자연 속에 너무도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는 완벽한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준비해놓은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10.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11.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소멸하고 고통은 사라진다.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붓다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12. 놀랍지 않은가. 이 싱그럽고 건강한 순간을 나는 무한히 경험해왔던 것이다. 내가 이 삶을 다시 선택한 이유, 한 번 더 나로서 살아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그렇게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찰나의 순간은 무한히 중첩된 내 삶의 한 지점을 강하게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을 찾아 교회로 향한 시간. 신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 비어 있는 일요일 오전의 캠퍼스에서 나는 대지의 기쁨으로 가득한 영원의 순간을 자각한 것이다.




13. 도서관에서 살았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저녁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창밖으로 노을이 질 때였다. 도서관 창으로 비친 노을이 실내를 붉은 빛으로 가득 물들이는 게 좋았다. 그 따뜻한 빛은 도서관의 고요와 어우러져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나는 노을 가운데 앉아 붉게 물든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하루에 한 권 정도를 읽었다. 두꺼운 책이면 더 길게 걸리고, 얇은 책이면 더 짧게 걸렸다. 이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하루에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느냐고 말이다. 빨리 읽는 비법이나 어떤 요령이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사실 그런 건 없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특별히 할 게 없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누구나 그렇게 하루 종일을 쥐어주면, 아무리 천천히 읽는 사람이라도 보통 두께의 책 한 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14. 책을 읽는 목적도 없었다. 자기를 계발하거나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었다. 마음이 가는 책을 산책하듯 읽어나갔다.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사이를 천천히 둘러보는 게 좋았다. 서가가 만든 그늘, 적절한 온도, 오래된 책 냄새, 표지의 감촉이 좋았다. 아침 도서관의 한산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철학, 종교, 사회, 과학, 문학 서가를 가리지 않고 배회했다. 마음에 드는 제목과 적절한 두께의 책들을 골라, 대여섯 권 정도가 되면 자리에 앉아 읽었다.




15.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럼 굳이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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