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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반향초 Feb 07. 2022

필사 노트32- 채사장의  '열한 계단'2


[채사장의 열한계단]


오늘 하루 정신이 없었다. 오전에 갑자기? 재판이 하나 생겼고, 오후에 있었던 한 시간 넘게 줄다리기를 했던 조정은 결국 성립되지 않았다. 이번 주는 바쁜 주인데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기진맥진이지만 그래도 나는 노트북을 켜고 앉아서 문장들을 정리하고 있다.






오늘은 채사장의 ‘열한계단’의 문장들을 정리했다. 백면서생인 내가(사회경험이 없지는 않지만..) 열한계단을 읽으면서 가장마음에 새겨야할 내용들이 처음에 나오는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던것 같다. 사실 내 취향의 음악은 아니였지만 열한계단을 읽는 동안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를 들었고, 작가님이 이 노래를 통해 받았던 위로와 감동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1.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2.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3.



지금은 안다. 이렇게 불안하고 조급한 시간들도 개인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말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는 아름다운 방법만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시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4.



다행히도 나에게는 시간이 주어졌다. 3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여행자가 되어볼 수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현실세계와 현실 너머의 세계를 떠돌았다. 끝없이 펼쳐진 사유의 대지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풀꽃과 동물들을 관찰하고, 마을의 골목길을 돌고, 펼쳐진 게르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5.



내가 꿈꾸던 군대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포병 장교로 지원했던 이유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 때문이었다. 현대 언어분석 철학의 거장인 비트겐슈타인은 순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신념에 따라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적들의 1차 타격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전방의 관측소에 지원했고, 빗발치는 포탄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했다. 대학 시절 나는 그의 삶을 동경했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는 초연하게 스스로를 이겨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6.



구름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색채의 변화를 매일 관조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의 큰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향유하지 못했던 기쁨을 모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사람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온종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직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이상해보였을 수도 있겠다.



7.



체(체 게바라)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8.



체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냉철함과 강직함을 잃지 않았고, 매우 용감했다. 전투 중에 피델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애쓰는 것에 비해, 체는 항상 앞장서서 달려갔으며 용맹하게 싸웠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9.



그(체 게바라)는 또래들보다 눈에 띄게 성숙한 아이였다. 책 읽는 시간이 많았다. 호흡이 어려워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 볼테르, 랭보, 보들레르의 시를 읽었고 네루와 간디의 책 그리고 존 스타인벡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읽었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평생 지속될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후에 밀림 속에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그는 글쓰기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10.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음으로써 A라는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A에 대해 체험했어야만 합니다.




11.



우리가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은 다른 영화, 다른 책, 다른 이야기를 봅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삶에서의 체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12.



저에게는 영화나 책이나 다른 여러 텍스트를 접하게 될 때마다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칼 융이 《티벳 사자의 서》를 해석하며 붙인 말입니다. 그는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13.



“티벳 사자의 서”는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 세계란 나의 내면 세계라는 것을요. 더 놀라운 건, 죽음 이후의 세계 역시 나의 내면세계라는 것이죠.





14.



풍족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나의 세계는 지옥일 것이다. 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천국이라면 세계는 천국일 것이다. 참고로 여섯 개의 세계는 각각 자만, 집착, 질투, 무지, 탐욕, 증오를 상징한다.




15.



모든 것은 네 마음의 반영이고,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네 마음이 전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가 있고 너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세계를 그려낸다.


이 세상이 허망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너의 마음이다.




16.



사고 이후에 알게 되어 매일 듣고 있는 노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당시에 내가 이 노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가수가 누구인지, 노래의 가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는 그녀의 깊고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그 깊은 목소리는 나를 항상 예민하게 몰고 가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17.



그녀의 음성은 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직접 호소하는 듯했다. 나는 눈을 떠 가수의 이름과 노래 제목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Gracias a la vida’. 나는 그렇게 그녀의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이끌었다.




18.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메르세데스 소사-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소리와 문자를 주어

어머니, 친구, 형제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가 걸어갈 영혼의 길을 밝혀줄 빛이 되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내 지친 발을 이끌어

도시와 시골길,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걸을 수 있게 하였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이 해방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 깊은 곳을 응시할 때,

내 마음 속에 요동치는 심장을 주었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과 눈물을 주어 행복과 슬픔을 구별하게 했고,

나의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가 되게 했네.

이 노래가 그것이라네.

그리고 이 노래는 우리들 모두의 노래라네.

세상의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나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19.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 노래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는 단지 음색과 가사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저히 삶의 감사함을 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깊은 영혼 때문이었다.




20.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던 당시의 노동자나 오늘날 최첨단 산업시설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본질적으로는 그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 《공산당 선언》을 읽다 보면 마치 오늘날의 상황을 묘사한 것만 같아 적잖이 놀라게 된다.(나중에 공산당 선언을 꼭 읽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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