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경험한 락다운
2020년 3월에 발리로 떠난 나는 발리에서 코로나 팬데믹의 직격탄을 경험했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휩싸이던 때였다.
'신들의 섬' 발리는 신들의 보호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켜갈 줄 알았지만, 느리지만 확실한 코로나 감염자 수의 증가로 락다운을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4월부터 6월까지 발리에서 락다운을 경험하게 되었다.
발리 사람들은 강력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마을의 몇 블록 단위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고 기도도 함께 드리며 힌두교 의식을 함께 준비하고 분담한다. 발리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이웃과 안면을 트고 알아가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래서 발리의 락다운은 이 공동체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각 마을을 지나가려면 그 마을 공동체 사람들이나 지역 경찰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어야 했고, 마스크 착용 검사와 손 그리고 오토바이 소독을 진행했다. 각 마을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꽤 충격이었던 것은 발리의 해변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3월 말 발리의 새해가 끝날 무렵부터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해변을 가면 지역 경찰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제지하거나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거나 선셋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해변에 있지 못하도록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벼운 경고 수준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해변을 이용했다.
발리의 서쪽 해변인 짐바란, 꾸따, 스미냑, 짱구 해변은 특히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서핑을 하거나 해수욕과 선탠을 즐기고 요가와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물론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발리의 선셋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해변에서 운동하고 선셋을 보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해변에 사람이 많이 모이기에 코로나의 확산을 부추긴다는 것이 해변을 닫기 시작한 이유였다.
처음에는 지역 경찰들이 감시하지 않는 이른 아침이나 밤에 해변을 찾았다. 해변의 모래를 밟으며 걷고 발리 바다 위로 떠 있는 별들을 보고 파도소리를 듣는 것은 발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 경찰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해변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조금씩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해변으로 들어갔다. 마치 땡땡이치려고 학교 담을 뛰어넘는 학생들처럼. 서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긴 해변 덕택에 감시가 심하지 않은 중간 즈음에 위치한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으면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어두워진 후 바리케이드를 넘어 해변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 밖은 웅성웅성, 사이렌 소리와 함께 언성이 높은 영어 대화들이 오갔다. 아마 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져 바리케이드를 넘던 몇몇 서양인들이 경찰에게 걸린 모양이었다.
담벼락 밖에서 한 서양인이 "조금 있다 나와. 경찰 있어."라고 손짓을 보냈다.
한참을 담벼락 밑에서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아, 이제 발리의 바다와는 안녕이구나. 돌아갈 때까지 더 이상 발리의 바다를 볼 수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4월 초, 결국 발리의 해변은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해변에 들어가지 말라는 현수막이 각종 나무판자와 대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걸려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서양인들은 귀국길을 선택했다. 발리에서 바다를 즐기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나는 바다가 없는 우붓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쪽 해변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음식점과 가게들이 문을 닫아 생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해변에 사람이 없으니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해변 없는 발리는 쓸쓸했지만 이렇게 거처를 옮긴 덕분에 나에게는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우붓에서 새로운 가족들을 만나고, 발리의 북쪽을 경험하게 되는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7월에는 다시 문을 연 발리의 해변과 만날 수 있었다.
발리에서의 짧은 락다운은 나에게 발리에는 해변 말고도 즐길 것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