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 비자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이 이제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거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생활에 익숙해졌고, 전 세계의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나아지면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터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디지털 노마더들을 본 것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였다. 발리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온 노마더들이 많은데, 시스템 엔지니어들이거나 회사에서 은퇴를 하고 본인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탁 트인 논이나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발리의 카페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참 자유로워 보였다.
에스토니아행을 단행하며, 에스토니아에서 최대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다가 에스토니아에도 e-residency라고 불리는 '전자 영주권' 제도와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도 디지털 기술의 보급과 활용도가 매우 높은 나라이다. 100% 가까운 정부의 시스템이 디지털화 되어있고, 인터넷 자유도도 세계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들에게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터넷을 통한 정치 참여도도 높고 스타트업 창업도 쉬운 편이다.
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하고 2004년 EU에 가입하는 등 짧은 시간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 내야 했던 에스토니아 성장의 원동력에도 디지털 기술에 투자한 정부의 노력이 있다.
국경 없는 디지털 사회, e-residency(전자 영주권)
2014년, 세계 최초로 에스토니아는 국경 없는 디지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전자 영주권(e-residency)'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가 맨 처음 만들어졌을 때 한국에서도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제도가 꽤 유명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에스토니아행 준비를 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제도의 장점은 EU에서 법인을 세울 수 있다는 점, 온라인으로 모든 절차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직접 에스토니아에 가지 않더라도 EU 국가인 에스토니아에 자신의 법인을 세울 수 있어 EU의 기업들이 받는 혜택들을 쉽게 받을 수 있고, 다른 EU 내 기업들과의 거래도 쉬워진다.
또한, 전자 영주권(e-residency) 신청에서부터 실제도 법인을 세우고 나서 이뤄지는 모든 절차를 온라인으로 할 수 있어 번거로운 대면 절차나 서류 상의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금 처리와 금융 거래 등도 직접 온라인으로 할 수 있고,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이러한 법인 절차들을 대리로 진행해주는 기업들과 연계시켜 준다.
이것이 '전자 영주권(e-residency)'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법인의 설립이 에스토니아 내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지 개인의 영주권이나 시민권 혹은 입국 비자 취득이나 체재 허가와는 무관하다.
세계 최초로 국경에 상관없이 전부 온라인으로만 창업을 가능하게 정부 주도로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기술에 대한 강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현재, 에스토니아 정부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8만 명 이상이 전자 영주권(e-residency)을 발급받았고, 실제로 1만 6,000개 이상의 법인이 설립되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에스토니아, digital nomad visa(디지털 노마드 비자)
코로나 팬더믹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에스토니아는 2020년 8월,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제도도 런칭했다.
에스토니아 외 다른 나라 기업에서 일하면서 원격 근무가 가능한 사람들, 에스토니아 외 나라에서 수입이 발생하는 프리랜서나 개인 사업자 등 다양한 형태로 장소와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1년 간 에스토니아에서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비자이다. 최근 6개월 간 월 수입이 3,504 유로 (약 500만 원) 이상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온라인으로 신청 가능해 한 달 안에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이다.
현재는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에스토니아에 입국할 수 있는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만 이 비자를 발급해주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나아진다면 이 비자를 취득해서 에스토니아로 건너오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 같다.
최근에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제도를 만든 에스토니아 말고도 사실은 꽤 많은 나라들이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제도 혹은 그와 비슷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태국, 스리랑카, 대만 등이 있고, 중남미의 카리브해 연안 국가, 유럽에서는 크로아티아, 체코,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조지아, 아이슬란드, 몰타, 노르웨이, 그리스, 이탈리아 등이 있다. 중동에서는 UAE도 이러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
각 나라 별로 조금씩 수입에 대한 세금처리와 비자의 신청 조건과 절차, 비자로 거주 가능한 기간이 다르기는 하지만, 자국의 산업 발전과 사회의 다양성 강화에 중점을 두고 제도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최근 6개월 간 월 수입이 3,504 유로 (약 500만 원) 이상임을 증명해야 하는 조건에서 당시 자격미달이었기에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노마드 비자를 신청할 수 없었지만, 다음번 에스토니아에 갈 때에는 비자를 신청할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 여권은 파워가 세기 때문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90일 이상 체재할 수 있지만, 디지털 노마드 비자가 있다면 1년 이상 비자에 신경 쓸 것 없이 체재가 가능하다는 점, 유럽의 경우 쉥겐 협약에 의한 90일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 입출국 시에 조금은 덜 엄격한 입출국 심사가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디지털 노마드 비자를 따면서까지 에스토니아에서의 생활을 더 즐기고 싶었던 이유는 앞으로의 에스토니아 여행기를 통해 조금씩 더 꺼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