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그가 원하는 대화는 사실의 전달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화는 공감과 위로였다.
그는 매일 나에게 물었다.
-잘 잤어?
-점심 뭐 먹어?
-퇴근했어?
-집에 잘 도착했어?
나도 매일 그에게 답했다.
-따뜻하게 입었어?
-맛있었어?
-피곤하지?
-오늘도 고생했어.
그는 매일 꼬박꼬박 성실하게 연락을 해줬지만 나는 우리가 제대로 대화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하루를 남자친구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보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원하는 대화는 사실의 전달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화는 공감과 위로였다. 나는 대화에서 늘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느꼈고, 그는 바쁜 와중에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부담을 느꼈다.
문자로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전화로라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전화를 극도로 싫어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남들보다 유난히 전화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 여자친구와 전화 문제로 트러블이 많아서 전화가 아예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어디에 서있냐고 물어본 것 외에, 단순히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 그가 먼저 전화를 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다음에 하자.
-가족들이 집에 있어서 전화하기가 힘들어.
-미안, 전화 온 줄 몰랐네.
거절당하는 것은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거절하는 사람도 힘들겠단 생각에 전화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내 속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관계를 도려낼 것 같아서 다시 용기를 짜냈다. 다행히 두세 번 정도 짧게 통화했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그는 전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사전에 차단해버리기 시작했다.
-오늘 너무 피곤하다.. 집에 얼른 들어가야겠어.
그는 나의 부탁에 점점 지쳐갔고 나는 그의 거절에 점점 메말라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건 딱히 없지만 싫어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과 싫어하는 건 딱히 없지만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 그는 전자였고, 나는 후자였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아보려고 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거라고 책에서 읽었으니까. 그러나 그럴수록 내 속은 점점 곪아갔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는 걸 의미했고, 우린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이 희생해야만 하는 관계였다.
나는 늘 그를 이해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긴 건, 내가 그에게 "내가 얼마나 이해심이 많은데."라고 말하자 "네가? 널 이해해주고 있는 건 난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도 나를 위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무언가를 참고 있었겠지.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긴 했을까. 아니,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그는 N극이었고 나는 S극이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서로 같은 방향을 볼 수 없었다. 반대여서 끌렸던 우리는 끝끝내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극
내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을 때
넌 관계의 끝을 예감했고
네가 더 이상 미래를 말하지 않을 때
난 인연의 끝을 직감했다
나란한 발걸음은 다른 곳을 향했고
마주 본 얼굴은 진심을 숨겼다
악의 없이 서로의 상처를 헤집었고
홀로 쓰라린 고통을 삭여야 했다
의무는 애정을 짓눌러 한숨을 짜냈고
불안은 설렘을 밀치고 악몽을 불렀다
불가항력으로 끌리던 첫 만남부터
어쩌면 우린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우리의 극
끝내 좁힐 수 없는 서로의 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