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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Jan 28. 2016

한 겨울, 창문을 열면

포지타노의 추억 Vol.17


창문을 열면

쳐지는 풍경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당장에라도 선택하고 싶은 풍경,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포지타노가 바로 그런 곳이다.




산을 타고 굽이굽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좁은 2차선 도로, 도대체 무슨 보물을 숨겨 놓았길래 이리도 찾아가는 길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 로마에서 출발해 포지타노로 향하는 길은 운전에 능숙한 베테랑 운전자에게도 좀처럼 쉬운 길은 아니다. 더욱이 해가 빨리지는 한 겨울 포지타노로 향하는 금새 어둠이 짙게 깔린다. 작은 가로 조차 없는 산기슭을 달리며 핸들을 좌로 우로 수십 번 돌리다 보면 어느새 까만 어둠 속 누군가가 꽁꽁 숨겨놓은 보물 같은 불빛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포지타노다.


Positano, Italy


까만 산과 까만 바다,

그리고 그 까만 바다 위에 빛나는 환한 달빛을 마주하며 더 환하게 빛나는 포지타노를 채우고 있는 건 크고 화려한 빛이 아니라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소곤소곤 작은 빛을 밝히는 잔잔한 불빛이다. 저 멀리 아름답게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고 굽이 굽이 다시 산길을 달리다 보면 어서 저 곳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날 정도다.



Positano, Italy



12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한 겨울의 포지타노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는 오묘한 힘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위태롭게 지어진 집은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포지타노의 골목 한켠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한 겨울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쾌하고 기분좋은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마치

벌써 들어가서 자려고?

라며  골목골목으로 나를 이끄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포지타노의 포근한 밤, 달빛을 온 몸으로 맞으며 하늘과 바다를  바라다보면 마치 내가 밤하늘 은하수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저 멀리 산기슭에는 아말피 해변을 따라 또 다른 은하수가 둥둥 떠있다.


Positano, Italy


고요한 밤,

너무나 고요해서 스쳐가던 바람마저 길위에 스르륵 잠이 들 것만 같은 포지타노의 골목길을 산책 하고 있는 내 앞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머리가 하얗게 쇤, 크지 않은 체구이지만 그리 마르지 않은 단단한 모습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오른 팔에 팔짱을 낀 채 다른 손으로는 스웨터 옷깃을 여미는 푸근한 할머니의 모습이 조용히 아름답다.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러 왔다는 노부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걸어가는 데 귓가에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린 청년의  그것처럼 장난스럽다.


"여보, 나 방금 백악관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어. 당신도 받았나? 표정을 보니 아직 못 받았나 보군. 역시 백악관은 올해도 정말 중요한 사람에게만 카드를 보내나 봐. 하하하하" 할머니를 놀리는 할어버지의 말투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한 골목길은 노부부를 소년과 소녀로 만들어 버린다. 한참을 웃던 할아버지는 할머니 옆에 있던 꽃나무에서 꽃을 한송이 떼어 할머니의 스웨터 단춧구멍에 꽂고는 애교스러운 미소를 짓고, 꽃을 본 할머니는 이내 함께 웃어버렸다.
                                                                                            


아름다운 밤, 그날의 달빛과 바람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걸 비추는 따뜻한 불빛보다 더 따뜻하게 마음에 남은 건 바로 그 부부의 모습이었다.


포지타노의 아름다운 밤을 그렇게 접어 두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기어코 해 뜨는 모습을 보겠다며 장담하던 어젯밤 다짐이 무색할 만큼 창을 열자마자 쏟아진 햇살은 나를 한번 더 포지타노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다.


Positano, Italy


을 열자마자 쏟아져 내리던 햇살과

그 햇살을 받고 환하게 빛나던 꽃들, 바다, 새하얀 발코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해서 창을 열었다 닫았다를 몇 번 더 반복했다. 흰 창틈으로 스며들던 햇빛을 두 손 가득 담고 창문을 열면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어젯밤 꺼내놓았던 별빛을 거두어 드린 포지타노의 아침은 밤보다 더 아름답다.



만약 창문을 열면 펼쳐질 창밖의 풍경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포지타노의 해변을 떠올릴 것 같다. 추운 겨울 마저도 따뜻하게 녹여줄 것만 같은 포지타노의 아름다운 창밖 풍경은 따뜻한 밤 골목길에서 만났던 노 부부의 모습 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아름다운 밤, 그날의 달빛과 바람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걸 비추는 따뜻한 조명 불빛보다 더 따뜻했던 포지타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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