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음악, 그리고 인생이라는 춤.
여기 40세의 생일을 맞은 한 남자가 있다.
매즈 미켈슨 Mads Mikkelsen. 태어날 때부터 우수에 찬 중년의 얼굴을 가졌을 것 같은 배우다. 왠지 모를 후회와 서글픔이 깃든 촉촉한 눈빛. 마치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 음산하고 고요한 바다와 같다.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도 온전한 중년의 방황을 연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그가 두 눈의 눈물을 훔쳐내며 내뱉는 말이다.
중년이라는 게 그렇다. 미적지근하다. 회색빛이다. 열병 같던 청춘을 이제 막 지나와 지난한 늙음의 행렬에 몸을 맡긴 채 죽음을 향한 권태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세상에 기적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이 길이었는지 더 이상 생각나지도 않고,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뭐 대단히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더 이상 꿈꾸기를 멈추고 현실에 만족하라는 충고가 시작된다. 논어를 읽을 시기다.
극 중의 매즈 미켈슨은 중년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다. 일터에서도 가정 안에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그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친구의 말처럼 자신감도 즐거움도 결핍된 삶이다.
생일을 함께 축하했던 절친 동료 교사 셋도 상황은 비슷해서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대화 주제가 되는데, 이들은 함께 술의 힘을 빌려 보기로 한다.
이렇게 인간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는 덴마크 철학자 스코르데루의 가설에 대한 실험이 시작된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5% 를 유지하면서 이것이 실제로 사회적 직업적 수행 능력을 증진시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실험에 관한 룰은 술을 근무시간 중에만 마시고. 주말에는 마시지 않는 것이다. 이 규칙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은 매일 저녁 8시까지만 술을 마셨다는 헤밍웨이 까지 끌어 왔다.
그렇다. 올리비아 랭의 <작가와 술>이라는 책을 보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들이 여섯 중 넷 꼴로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하니, 작가와 창작과 술 사이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0.05%는 와인 1~2잔을 마신 수준으로 우리나라 음주 운전 처벌 기준 시작점은 0.03%다. 이 수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매즈 미켈슨은 음주 측정기까지 사들였다.
실험은 대성공.
모두 오랜만에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눈빛이 달라졌다. 전성기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수업이 잘 풀린다. 부인과 아이들과의 사이에서도 뭔가 전환점이 생길 것 같다. 삶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술의 힘에 매료된다. 알코올을 더 늘린다. 우리가 다 아는 중독으로 가는 수순이다.
최대 알코올 농도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시작한다. 궁극의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주변으로 부터 부정적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을 덧 붙인다.
음악, 춤, 친구, 그리고 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래, 우리가 정말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이거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가면서 그 안에서 나를 잃어버릴 만큼 삶이 복잡해졌다.
혈중 알코올 농도를 더 높여간다. 그리고 온전히 술에 모든 것을 내 맡겼을 때, 그들은 영화 초반에 나왔던 19살 얼치기 같던 청춘의 시기로 돌아가 테이블 위에 올라 춤을 추고, 타인과 시비가 붙고, 나체로 차도를 달리고, 침대에 오줌을 싸고, 길거리에 쓰러져 잠을 잔다. 그렇게 궁극의 해방감은 추태로 끝이 난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한 친구가 돌아오지 못하고 문제를 만들어 버렸다.
술 때문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친구, 이혼을 한 뒤 혼자 늙은 개와 살아가는 톰뮈다. 죽음을 앞둔 노견 라반은 혼자 화장실에 가기도 힘들다. 6개월 동안 노견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마음 졸였던 나에게는 더 와닿는 장면들이 많았다. 18년을 함께 보내고 소멸하는 생명의 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톰뮈는 술에 취한 채 노견과 함께 요트에 오른다. 구명조끼도 벗어버렸다. 알 수 없는 표정의 톰뮈의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다채롭고 사랑스러운 세상이여.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지구는 내게 아름다운 곳. 그 옛날 족장들의 시대처럼. 나도 남들처럼 고통으로 눈물 흘렸지. 나의 환상이 깨졌을 때 그러나 환상은 현실이 아니고 저주받은 건 현실이 아니라네. 싸워서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너와 난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난 이 세상을 사랑하네.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지구는 내게 아름다운 곳.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생들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잔디밭. 평화로운 오후의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매즈 미켈슨에게 톰뮈의 죽음이 전해 지고 실험은 파국을 맞는다.
영화는 영화의 전반에 걸쳐 덴마크 태생의 실존 철학가 키에르케고르를 인용한다. 청춘과 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자유의 현기증이며 축복이라고 했던 <불안>에 대한 이야기 까지. 평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살았지만, 인간이 불안한 이유는 "자유"라는 가능성을 가졌기에 때문이라고 말했던 키에르케고르. 죽을 수 있는 자유. 악을 행할 자유. 그 모든 자유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대가로 인간은 불안함을 느끼고, 그래서 불안은 오히려 축복이다.
<불안>을 설명해 보라고요?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실패라는 관념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라고 했죠. 타인과 삶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나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술은 아주 잠시 동안 우리를 이 모든 불안에서 해방시킨다. 현재 알코올 농도 0.05%. 매즈 미켈슨은 춤을 추고 나는 글을 쓴다.
*(실제로 스코르데루가 쓴 글은 좀 다르다. "와인 한두 잔이면 삶이 즐겁다. 우리는 아마 알코올 0.05%가 부족한 채 태어났는지 모른다"라고 쓴 글이 와전되어 0.05%가 부족하기 때문에 채워야 한다는 가짜 뉴스가 탄생했다고 한다. 감독이 영화를 찍을 때에도 실제로 믿고 있었을 만큼 많이 유럽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