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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Aug 05. 2022

결혼할 결심

중년 소개팅 실패기

이 글은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2022년 45세가 된 나는 일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무념무상 무욕의 백수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때때로 조용히 밀려오는 행복감과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감이 밀물과 썰물처럼 손바꿈을 하고 있지만 대체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언니, 소개팅할래?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소개팅? 소개팅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 본 것이 몇 년 만인가. 마지막 소개팅은 10년도 전이었던 것 같다. 강산이 변하는 동안 소개팅의 룰이 바뀐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 그래? 근데 누가 나랑 소개팅을 한데?


일전에 누군가를 소개해 준다고 했었는데, 그 남성이 다시 등장했다. 과거 나에게 소개팅 진행 의사를 묻는 와중에 다른 여성과 소개팅을 해서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하더니, 파투가 난 모양이었다.


- 한번 만나 보지 뭐.


나는 자만추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의 소개 없이 이성을 만나는 일은 없다. 줄곧 타인의 도움에 기대어 살아왔던 것이다. 10년 전에는 데이팅 앱을 이용해서 만나 보기도 했지만 헛짓거리였다.


소개팅 남은 제부의 회사 동료다. 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제부는 그날 저녁 바로 처형의 소개팅을 주선했다고 부모님께 얘기했다. 부모님은 제부를 <박 씨 물고 온 제비> 대하 듯 은혜로워하시며 크게 칭찬하고 기뻐하셨다.


- 내 성 서방이 한 건 할 줄 알았네.


어머니는 나에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둥 하여튼 별놈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다하더니 내 성격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전화통화를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기로 하셨다.


나는 이 나이를 먹고는 <너 ~~ 해볼래?>의 제안에는 <No 아니요>를 잘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위험하지만 않으면 일단 <예스>라고 외치고 본다. 결과는 복불복이지만,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일정대로 소개팅이 진행되었다.


소개팅남은 44세. 심지어 연하다. 나는 30대 초반에 마지막 연하를 떠나보내며 <내가 다시 이 어린 노무 새 X 들을 만나면 사람이 아니 무니다>라고 큰소리쳤지만, 뭘 모르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조용하고 진지하다. 어랏, 얼굴이 너무 멀쩡하다. 단점을 굳이 찾는다면 너무 말랐다. 내가 나에게 원하는 몸매를 지녔다.


내가 얼빠였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입을 벌리고 말을 할 줄 아는 것 만으로 칭찬받았을 만한 얼굴이다. 일반인으로서는 지나친 수준이었다.


- 얼굴 낭비 하고 있네. 아니 저 얼굴로 왜 혼자냔 말이야. 화가 나네.


나는 1년 동안 백수 생활을 하며 익힌 농담과 수 십 권의 책들에서 체득한 얄팍한 지식으로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내가 내 이야기에 웃고 있는 이 모놀로그적 대화의 현장. 20년간의 사회생활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지루하게 대화에 응했다. 취향이 없는 인간이 있을까? 근 미래 인간형 로봇 파트너가 상용화된다면 이런 느낌일지 모른다. 그는 미래에서 왔다.


그에게는 주말마다 만나던 돌싱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가 재혼 상대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주말에 할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할 수 없던 이 <결혼할 결심>을 몇 번이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결혼할 결심>을 해야 상대가 나타나는 것인가. 상대가 나타나야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대화의 끝에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중년 싱글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3시간 남짓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만남을 약속했지만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았다.




 

Photo by Zoriana Stakhni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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