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묘하게 라임이 살아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다. 인생 종 치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은 이 "우물쭈물"이라는 긴박함은 우리나라 한 신문사에서 번역하며 덧붙인 말이다. 쇼 선생, 나도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는 것이 그냥 충분히 오래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더군요. 그러나 나의 노오력이란 애당초 늘 부족한 것이어서 오늘도 저는 혼자 살고 있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조급증이 밀려왔다. "결혼 안 해도 되나. 애가 없어도 되나. 이미 노산인데 큰일이군." 마음만 급했지 회사와 집을 오가는 생활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30대 초반까지 물 밀듯 들어왔던 소개팅은 30대 후반이 지나면서 "그랬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의 구전설화로 남았다. 곤히 잠든 나의 등짝을 내리치며, "너는 왜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하질 못 하니?, 네가 뭐가 못났니? 너는 IT 업계라면서 왜 인터넷으로도 사람을 못 만나니?"라고 짠한 서러움을 토하던 어머니의 타박도 이제 "따님, 희망을 잃지 마세요. 할 수 있어요. 파이팅"의 이웃사랑 캠페인류로 바뀐 지 오래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매우 격양된 목소리로 성당 수녀님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라며 메모에 적어온 소개를 읊기 시작한다. "아, 잠깐. 그런 비슷한 스펙을 가진 남자, 엄마 잘 아시는 분 아드님, 내가 만나본 것 같은데. 7-8년 전에요. 몇 달 만났잖아요. 그 남자랑." 어머니는 그럴 리가 없다며 내빼시더니, "이것은 필시 주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이도다."라며 같은 사람인 것을 확인하셨다. 나는 만약 10년쯤 후에 또다시 이 사람을 소개받을 기회가 온다면 운명적 데스티니로 알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겠다.
나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어머니는 중년 로맨스에 대한 취재라도 하러 다니는지, 만날 때마다 40-50대에 격정적 사랑을 경험하고 결혼에 골인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아버지는 서슴없이 이제 결혼 하긴 힘들다고 단언한다. "재테크를 열심히 해라.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얼마나 모았느냐.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이냐. 네 사업을 해 보면 어떠냐." 한 집에 살고 있는 이 부부의 온도차는 무엇. 그러나 나는 착한 딸. 두 장단에 모두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한 때 클럽 죽순이란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집집마다 늙어가고 있는 미혼 자식과 강아지 한 마리씩은 있다고 한다. 슬프게도 우리 집 강아지는 작년에 하늘나라로 갔고, 이제 나만 남았다. 아니다. 거의 생사만 확인하고 지내는 막내 남동생도 결혼을 안 한 것 같다. 그 자식이 결혼을 했다면은 내가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다. 모를 일이다.
나는 비혼 주의자가 아니다. 인생이든 사업이든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흥미로운 신세계가 열린다. 좋은 영화가 장르를 넘어서듯, 좋은 만남은 제도를 넘어설 것이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우리나라 40대 미혼자는 약 12%인데, 모두 적극적으로 결혼 활동을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만날 수 있다면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 보고 싶을 정도다. 인구 통계상 50세 전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그 이후는 '평생 미혼'으로 간주하니, 그 전에는 모두 '잠재적' 미혼자일 뿐이다.
나는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하고, 또 혼자 노는 것이 좋아서 대부분의 시간 행복하다. 그러나 한 달에 한번 우울증과 걱정, 피곤함, 식탐까지 절정에 다다르는 월경 직전 기간이 되면 '아, 이제 내 인생에 로맨스는 끝인가. 어차피 썩어 없어질 이 몸뚱이를 제대로 한번 써먹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인가. 혼자 늙어 죽는 것인가. 아이가 없어도 괜찮을까.'를 뇌까리며 "이 번생 망했어, 망했어"를 샤우팅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 상황의 괴리감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급이다.
이 모든 갈등과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늙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늙음의 대장정이 시작되고 있다. 혼자여도 둘이여도 나는 늙어 간다. 내 평화스러운 주말의 집합들은 이제 젊음의 카테고리에서 늙음의 그것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고, 혼술과 혼밥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매일매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절제된 식이요법을 하고, 오메가 3와 비타민C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챙겨 먹어야 한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기로 한다. 마흔에 미혼, 여전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 늙어가는 나에게 적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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