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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Oct 17. 2019

월경 증후군과 호모도미난스

11시가 넘은 주말 밤, 장강명의 호모도미난스를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일어나 돼지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갈빗살이었다. 그래, 탄수화물이 아니라 단백질이니까 괜찮아. 아무 말 합리화로 죄책감을 무마시켰다. 딱 3줄만 먹는 거다. 맥주 딱 한 캔만 더 마시는 거야. 그 사이에 초콜릿을 먹었다. 


탄수화물이 없는 야식은 공허하다. 어랏, 제멋대로 물이 끓고 있다. 짜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래, 국물이 없는 라면은 괜찮아. 돼지고기에 짜파게티까지.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다 먹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잘까.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생각했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이건 그건가. 뷰티 인사이드. 이제 내 얼굴은 매일 바뀌는 건가. 어젯밤에 오징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부엌으로 간 나는 널브러져 있는 프라이팬과 냄비를 보고 경악했다. 이 집엔 나 혼자 살고 있고, 그렇다면 범인은 이 안에, 아니 내 안에 있어. 


어젯밤의 일들을 시간 순으로 배열해 본다. 6시에 저녁식사를 한 이후로,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무언가 먹고 있었어. 이 맥락 없는 메뉴 구성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느낌이야. 내가 혹시 호모도미난스에서 나온 정신 조종 능력을 가진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 속에서 흰 원숭이들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다른 사람도 조종하지만 나는 나만 조종할 수 있다는 것쯤 되려나. 이 흰 원숭이들은 정신 조종 능력을 가지는 대신 극도의 자기혐오와 허무주의에 빠진다.


내 안에 여러 자아 중 한 녀석이 호모도미난스 인 것이다. 그 녀석은 식탐이 많은 허무주의자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 녀석의 지배력은 상당히 강력해서 나는 그 기간 동안 상시의 내 모습을 잃게 된다. 인간은 그저 오해와 고독 속에 죽어가는 존재인 거야. 이런 지리멸렬한 인생 따윈, 먹어버리자.


나는 모든 일정을 구글 캘린더로 관리한다. 회사에서 쓰던 것을 개인 영역으로 가지고 온 것인데, 삶이 좀 정리되는 느낌이 있다. 일정표로 짧은 일기를 쓰는 셈인데, 거의 내 삶에 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생리 일자도 마찬가지다. +29일로 자동 계산되어 매달 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의 주기란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기록된 일정에서 벗어나는 일도 거의 없다. 


월경전 증후군이란 생리 전 7-10일부터 생기는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증상을 말하는 데, 이 증상들은 대체로 생리를 시작하면 없어진다. 70-80%의 여성이 이런 경험을 하고, 20-40%의 여성들은 이 증상으로 힘들어한다.  증상이 심해져 월경전 불쾌감 장애로 이지기도 하는데, 그냥 그렇게 넘길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일정관리 덕에 좀 더 계획적으로 이 증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지금 예민해질 타이밍이군. 며칠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어. 어쩐지 먹고 싶더라니. 오늘 이 모임에 나가면 헛소리 하기 좋으니 안 나가는 게 낫겠군. 며칠을 집에서 뒹굴 거릴 준비를 한다. 어차피 이 시기에 나는 한 달 중 가장 못생겼다. 잠도 잘 오지 않지만 침대에 누워 아찌(나의 반려견)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것도 이 시기다. 감성 폭발. 


망할 놈의 호르몬. 갑자기 욕도 한다. 이러다 폐경을 맞이하고 갱년기라는 것이 오고 그러는 건가. 그럼 내 호모도미난스 자아는 사라지는 건가. 내가 이제 이 녀석 걱정까지 하고 앉아 있나. 못났다 못났어. 아찌야...... 너는 왜 먼저 가버렸냐. 대게는 이런 의식의 흐름이다. 


일정표 알람이 깜빡거렸다. 바로 오늘이군. 그래, 좋았어. 이 번달도 잘 버텼구만. 

그럼, 다음 달에 다시 보자고.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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