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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Oct 19. 2019

나를 부르는 숲, 남산

가을은 짧아요. 집에 있지 말아요. 

가을 주말, 산에 사람이 많다. 특히나 이렇게 기분 좋은 바람이 콧구멍으로 숭숭 들어오는 요즘 같은 날씨엔 어디든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 


날씨가 아니더라도 숲이 나를 부르는 날이 있다. 마음의 실타래가 배배 꼬인 날,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독설을 멈추기 힘든 날,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컨디션만 좋은 날,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날에는 숲이 나에게 손짓을 한다. 어이. 미간에 주름잡고 앉아 있지 말고 나와. 


명동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간다. 뒤를 돌아보면 담쟁이넝쿨 벽을 오른쪽으로 두고 오르막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남산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아저씨들이 승용차를 대상으로 돈가스 집 호객을 하고 있는 길에 다다르면 길 맞은편으로 남산 4번 출입구가 보인다. 여기까지 오면(입구부터 30분) 이미 산을 다 오른 느낌이 들면서 1차 고민이 시작된다. 돈가스나 먹고 집으로 돌아가? 

이 유혹을 뿌리치고 4번 출입구 계단을 향해 오르면, 빽빽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고요한 산책길이 시작된다. 전철을 나와 오르막 길을 오르며 차올랐던 숨이 제자리를 찾고 초록의 배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낮은 계단들을 올라 드디어 둘레길로 합류되는 지점에 다다르면, 왼쪽의 오르막길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후로는 경사도 거의 없이 완만하고 편안한, 그야말로 둘레길이다. 


갓길로 흐르는 실개천의 물소리와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청명한 새소리가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한낮의 정경이다. 영화에서는 주로 이런 장면들 뒤로 쓰나미가 밀려온다던가, 외계인이 침략한다던가, 전쟁이 일어난다던가 했었지. 


그렇게 계속해서 3킬로(1시간) 정도를 가면, 갈림길에 커피차가 보인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 가면, 계단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있다. 

성벽을 오른쪽으로 두고,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이 계단을 계속 올라간다. 이 계단에서 필요한 것은 내 요가 선생님의 말 대로, '아 이러다 죽겠네' 생각했을 때, '하나 더'를 외치는 정신력 일지 모른다. 


나는 원래 그런 정신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저 계단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에, 그저 열심히 올라 결국 정상에 선다. 


그 계단의 끝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울 시내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 작은 숲길은 내가 남산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나는 시간도 많고 가까이 살아서 남산 길을 요리조리 참 많이도 다녔다. 


이 길을 걸으면 다시 엉켰던 실타래가 풀리고 입꼬리가 내려가고, 몸이 적당히 피곤해지고, 여전히 질투는 나지만 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지. 하면서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 숲길을 나와서 남산 서울 타워 쪽으로 올라간다. 관광버스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관광도 와 주시고 참 고마운 분들이로군. 나는 관대해졌다. 

고양이 한 마리가 숲길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고 있다. 닌겐들이여, 뭘 그리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사나. 다른 인간들도 나처럼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던데... 


남산 서울 타워를 오른 쪽으로 두고 버스들이 나가는 내리막길로 쭈욱 내려가면 남산 도서관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도서관에서 길을 건너, 용산 도서관을 지나 후암동 골목골목을 지나 서울역으로 내려간다. 총 하이킹 시간은 2시간-2시간 30분. 


날씨가 너무 좋다. 가을엔 나 같은 집순이들도 모두 기어 나와 대자연이 우리에게 준 축제를 즐겨야 한다.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오늘 이어령 선생의 인터뷰를 보다 발견한 말이다. 죽음 곁에 가지 않더라도, 이 것이 무슨 말인지는 오늘 같은 날씨에 하늘만 쳐다봐도 알게 된다. 


빌 브라이슨처럼 3천 킬로의 하이킹을 나설 것도 없다. 당장 운동화를 신고 산으로 가자. 숲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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