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you wouldn't get it.
영화를 보며, 얼마 전 책에서 본 웃음과 분노의 의학적 해석이 떠올랐다.(나라는 이상한 나라/송형석)
웃음, 고통스럽거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뇌를 보호하기 위해 내인성 마약물질을 분비하는 것
분노, 약자가 강자에게 이기기 위해 순간적으로 육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기술
극 중 아서 Arthur는 병든 모친을 모시고 광대 노릇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웃음을 주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되는 일은 없고, 세상은 그에게 유독 무례하고 불친절하며, 잔인하게 그를 착취한다. 애칭은 해피 happy이지만 살면서 1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 영화 속에서 고담시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가듯 그의 마음속도 처리하지 못한 분노로 가득 차올라 마침내 지옥이 된다.
답답했다. 영화 전반부에선 정말로 누군가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며 "자, 한 사람이 어디까지 불행해질 수 있는지 한번 잘 봐."라고 다그치고 있는 것 같은 육중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삶이 그에게 끊임없이 귓속말을 한다. Maybe your death makes more sense than your life. 죽는 게 더 나을 걸. 그는 살기 위해 이 문장으로 농담을 만든다.
'도대체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분노는 기어이 폭발한다. 내가 죽거나 니들이 죽거나. 어차피 선택은 하나였으니까.
영화를 통 틀어 가장 통쾌했던 순간이었다. 사람이 셋이나 죽었는데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내가 항상 그랬지. 술 텨먹었으면 얌전히 집에 들어가라고. 이 사건을 만약 기사를 통해 접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미치광이가 잘 나가는 젊은 은행원 셋을 죽인 사건. 미치광이 따위에 감정을 이입할 사람은 없다. 어차피 세상엔(아니, 대한민국엔) 제대로 된 기자들이 별로 없다는 걸 아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렇게 아서 Arthur는 조커 Joker로 각성한다. 그의 인생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 그의 뒤를 바짝 쫓으며 비극적 삶의 목격자 역할을 자처하던 나는 다시 관람객으로 돌아와 방관자가 된다.
아서가 고담이라는 미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웃음, 망상, 그리고 춤의 삼위일체는 눈물, 고통, 폭력으로 얼룩진 현실의 씨앗에서 자라난 것이다.
타락천사인 루시퍼와 대천사 미카엘이 쌍둥이 형제 일지 모른다는 구약성서의 설정처럼, 어쩌면 선과 악의 대치 점에 있는 아서와 부르스도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을 지 모른다. 영화에는 이것을 증명하는, 혹은 부인하는 떡밥들이 잔뜩 뿌려진다.
결말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존재하고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더 흥미롭다. 오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의 연기는 그의 정신상태가 걱정될 정도로 탁월하다. 또 보러 가야겠다.
영화에 대한 해석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어쨌거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건 결국 하나. Don't forget to Smile. 뭘 신경 써요. 우리 웃기 싫을 땐 웃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