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리 Jan 29. 2021

우리는 친구입니까?  

 

30대 초반의 일이다. 독립한 지 3년이 넘었던 나는 외롭고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퇴근해서 집으로 향하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혹시 XXX 아니니? 나 OOO야. 기억나? 고등학교 때." 

"아우, 야. 웬일이니. 몇 년 만이냐 이게." 


원래 연락하던 단 한 명 친구를 제외하고,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선 채로 빠르게 근황 토크를 이어갔다. 친구도 나와 사는 동네가 같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고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 주말 밤 치맥 콜'을 외치고 헤어졌다. 


며칠 후 "너는 뭐가 그렇게 바쁘냐"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치맥 타임. 똑같은 넋두리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꼰대와 미친 것들이 그 회사라고 없을 리 만무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는 상황은 참기 힘들었다. 


만나고 바로 다음 날 저녁,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 뭐해? 와 함께 이어지는 오늘 회사에서 말이야. 블라블라...... 나는 파이팅 마니아인지 <아 그래, 그런 사람들이 있지 뭐. 힘내라. 밖은 추워. 버텨야 돼! 파이팅! 을 외치고 1시간 만에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 날도 또 전화가 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내 회사도 아닌데, 이렇게 까지 알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었다. 셋째 날 전화가 왔을 때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아 정말 피곤한데...... 부재중 전화가 2번 남겨지고, 카톡이 시작되었다. 나는 가끔, 대충 답변을 남겼다. 


원래 말하는 사람 쪽은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법이다. 그래서 지루함은 온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 된다. 나는 점점 '그래서 어쩌라고'가 되어 갔다. 그들이 단체로 퇴사를 하지 않는 한, 이 넋두리의 지옥은 끝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나는 내용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영혼 없는 맞장구와 칭찬을 섞어가며 만성 불만증에 걸린 그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이 망할 놈의 파이팅. 이 상황은 3개월이 넘게 지속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이렇게 받아 준 것이 그 친구가 나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어째 연락이 뜸해지고 회사에 대한 불만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가 어떤 남성과 썸을 타기 시작한 후였다. 그러나 좀처럼 발전이 없는 그와의 관계가 다시 화두가 되면서 주춤했던 연락은 더 늘어났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 친구잖아. 이 나쁜 자식은 어쩌자고 연락을 안 해서 엄한 사람을 고생시키고 있는 것인지. 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좋아한다는데 좀 만나주지 않고.'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 썸남에게 엄청난 수의 카톡과 문자와 부재중 전화를 남기고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도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사람과 조직을 향한 배신감과 깊은 절망감이 이 친구의 삶을 부식시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감정들을 최근에 만난 나를 쓰레기통 삼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그 친구에게 20여 통의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와 있었다. 뭐해. 힘들다. 그 자식이 어쩌고 저쩌고 새벽까지 계속된 것 같은 그 독백들. 그와의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 외침)한 스크린 캡처들. 질려버린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회의를 다녀오니, 또다시 쌓여 있는 카톡. 


슬슬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간 다시 부재중 전화에서 시작해 왜 전화를 받지 않냐는 문자를 넘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는 원망과 질책의 카톡이 이어 지고, 페북으로 DM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기 핸드폰 번호로 하면 피한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번호로도 전화를 해댔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러냐.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메시지들의 홍수. 나는 그 기세에 눌려 아예 어떻게 다시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피하고만 싶었다. 


내가 묻고 싶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냐. 그렇게 부재중 통화가 어물쩡 20여 통을 넘기고, 그 친구가 내 인생에서 드디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괜히 겁을 집어 먹은 나의 섣부른 침묵이 그 친구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관계에서 잠수 이별만큼 비겁한 것이 있을까. 좀 더 매너 있고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는 없었을까. 


서점을 어슬렁 거리다 눈에 띈,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성유미, 인플루엔셜)>의 책장을 넘겨 보며 그때가 떠올랐다. 책은 우리는 모든 관계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관계는 쌍방향이고, 서로 선택하는 것이다. 


소모적인 관계에는 매듭이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다.   



Photo by Hannah Rodrigo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차인표"씨와 진정성에 대한 탐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