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리 Nov 02. 2021

춘광사설과 이과수 폭포

지독한 사랑의 끝 

2019년 12월.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페루 쿠스코를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것이지만, 어쨌거나 떠나기 전 여행 준비를 한답시고 한 것은 해피투게더(춘광사설春光乍洩, 1997)를 다시 본 것뿐이다. 


리즈시절의 장국영과 양조위가 나오는, 왕가위 영화는 못 참지. 


중국어 원제인 춘광사설은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빛이란 뜻이다. 구름이 꽉 들어찬 흐린 하늘, 그 순간만은 날씨를 바꿔버릴 듯 강렬하게 비추던 봄 빛도 어느새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열병 같던 사랑이 떠나가고, 인생은 여전하다. 


여기 상처를 가진 나쁜 남자, 돌아갈 곳이 없어 헤매는 발 없는 새, 보영(장국영)이 있다. 그는 매운맛 사랑의 결정체이며 네가 떠날까 봐 내가 먼저 가방을 싸는 유리멘탈의 소유자다. 오늘 만을 사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돌아갈 곳도 미래도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을 사랑하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를 사랑하는 아휘(양조위)가 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양조위가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이다. 둘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있고, 이과수 폭포를 향해 가는 길이다. 나처럼 말이다. 

장국영과 양조위 (courtesy of Janus Films)


물론 나의 여행에 사랑 같은 것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는 없었다. 상당히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관계에 관해서는 어째서인지 절전 모드를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 <지독한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흥미롭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미치고 펄쩍 뛰는 사랑에 대한 로망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단체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이후 땡볕 아래서 땀을 흘려가며 걸어 걸어, 길게 줄을 지은 사람들에게 밀려 밀려, 폭포 쪽으로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그리고 폭포가 보이기도 전에 시작되는 웅장한 물소리와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 그 거대한 폭포 앞에서 왠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과수 폭포의 압도적인 에너지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이과수 폭포 2019


보영(장국영)이 떠나고, 아휘(양조위)는 함께 일하던 장(장첸)과 친해진다. 이후 아휘는 이과수 폭포로, 장은 세상의 끝으로 불리는 우슈아이아(Ushuaia)로 간다. 시련당한 자들의 슬픔을 씻어준다는 등대를 찾아. 나도 작은 비행기를 타고 우슈아이아에 도착했다.

펭귄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우슈아이아 2019


설원이 펼쳐진 대 자연의 작은 마을에는 펜션 건설이 한창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펭귄을 보러 나갔다. 콧구멍이 뻥 뚫리는 맑은 공기 덕에 슬픔이 사라졌다. 도시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미세먼지와 매연이 만들어낸 부작용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이과수 폭포에 간 아휘는, 아르헨티나의 삶을 끝내고 홍콩으로 돌아간다.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지독한 사랑의 끝에는 보영만이 위태롭게 남겨졌다. 아휘도 없이.  

  


 


작가의 이전글 백수 이모 vs. 어린이 조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