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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Oct 08. 2021

백수 이모 vs. 어린이 조카

Round 1: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조카가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더니 조금 건방져진 듯하다. 글을 깨치더니 닥치는 대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고 먼지 같은 지식으로 대 이모님, 바로 나에게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철스님께서 함부로 글을 읽지 말라고 하셨거늘.


"너 인마, 이모 나이 40 넘은 거 알아?"


"알아."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조카가 그만 말하고 거기에 파란색을 칠하라고 주문한다. 무슨 '유미의 놀이터'인가를 색칠하고 있었고 오늘 끝내야 한다.


"이딴 걸 왜 하는 거야." 나는 컬러링 북 같은 힐링계 잡일 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말을 들은 조카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지 엄마를 부르고 내가 한 얘기를 그대로 전한다.


"언니도 참, 왜 그런 얘기를 해. 얼른 유나한테 사과해."


"유나야, 이모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 즉각적인 사과는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동생의 중재가 끝나고, 조카와 나는 다시 색칠하기에 돌입했다.


"이모 참 잘하네. 여기도 해 봐."


조카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들은 것을 나에게 써먹고 우리 집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나뿐이다. 나는 조카의 가르침이 많이 필요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우리 유나는 어쩜 이렇게 집중력이 좋을까. 유나야, 커서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할머니 맛있는 거 사줘야 돼. 알겠지, 손녀."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카가 울기 시작한다. 당황스럽다.  


"왜, 또 무슨 일이야?, 나 때문이야?"  


제 발 저린 내가 안절부절 하자, 동생이 말했다.


"유나 일 하기 싫데. 회사 가는 게 세상에서 젤 싫데"


"뭐? 그것 때문에 운다고? 약 20년 후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눈물이 난다니. 조직 생활을 잘 아는 녀석이구만."


"유나야, 너 과자 사 먹으려면 돈이 필요 한데. 일을 해야 되는데 어떡하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직업을 가진다는 거야."


이때 조카가 상당히 무겁다는 시늉을 하며 저금통을 들고 나온다.


"유나 지금 돼지 저금통에 저금하고 있떠."


 "얼마 있는데? 그 정도로는 택도 없는데. 그런 거 천 개, 아니 만 개는 있어야 돼. 너 1만 개가 어떤 숫자 인지 알아? 대충 엄청나게 많은걸 말하는 거야. 알겠어?  그리고 그렇게 저금하는 방법으로는 안돼. 너 지금 물가상승률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뭐라고?"


조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제도 할머니 방에서 20원 줏었떠."


"20원? 와, 안 되겠네. 리슨 케어풀리 유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어. 지금 당장 저금통을 깨서 돈을 은행에 넣고. 아니지,  아니지. 당장 주식을 시작해야 돼. 그럼 아마 일 안 해도 될 수도 있어."


"쥬띡?"


"아, 주식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유나가 그 회사의 주인이 되는 거야."


"회사에서 뭐하는데? 이모도 일 안 하잖아."


"..........."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조카의 멱살을 잡을 뻔했으나 동생이 거든다.


"유나야, 이모는 맨날 밤 세우고 일해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그랬어."  


"집에 안 들어 왔떼??"


"넌 도대체 언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하느냐."


아버지가 갑자기 대화에 동참하시면서, 이야기는 갈 곳을 잃고 나는 피곤하다.


조카에게 일하는 여성의 롤모델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조카를 만나러 갈 때 정장 입고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끼고, 노트북을 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오늘 서점에서 "나의 직업은 부자입니다."라는 표지의 책을 보고 깨달았다. 하긴, 직업이 꼭 회사원일 필요는 없지.



유나야, 너도 웬일인지 부자가 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지. 부자가 직업일 수도 있다는구나. 내가 듣기로는 직업이 미인인 사람도 있다지만, 우리 유전자로는 안될 것 같다. 하긴 모르지. 미래에는 어떤 미인형이 인기일지.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물론 ‘일’이라는 것도 너의 세상에서는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 네 세상은 내 세상 너머에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12시 14분, 네가 하교 하는 시간, 교문 앞에서 다른 여러 어머니들과 함께 정장을 입고 너를 기다리는 일이지. 안경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왜냐하면 이 이모는 바쁜 모던 커리어 여성이기 때문이야. 그 커리어라는 게 꼭 남의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 일 필요는 없지 않겠니? 


이 백수 이모는 네 교문 앞에서 기차를 예약할거야. 다다음주부터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거든. 이 작업은 꽤나 섬세한 컨트롤을 요구하고 나는 상당히 숙련된 IT업계의 일원이지. 아니, 일원이었지.


네가 당장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게 바로 어른의 세계란 거야. 


알겠느냐,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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