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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May 31. 2021

'연대'하자고?! 왜? 어떻게?

"연대" 학습노트 제2화 : 왜 필요한가? 어떻게 하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일에는 에너지가 든다.


사람은 더울 땐 더 시원하게 있고 싶고, 추운 땐 더 따뜻하게 있고 싶다. 밥을 차리고 치우며, 빨래를 하고, 가족을  돌보고, 청소하는 생활에 필요한 노동, 일상이 더 편해지면 좋겠다. 또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으며, 맛있는 것을 먹고, 내가 입는 옷은 남과 다르게 왠지 멋지고, 세련되었으면 좋겠다. 삶에서 꼭 필요한 기본 의식주 외에도 많은 물건과 서비스들이 개인의 즐거움과 편리, 사회적 지위와 같은 욕망이 더 해진다. 사람의 욕구는 인류의 탄생부터 줄 곧 있었던 일이지만, 산업혁명 이후, 자원을 에너지로 변환하고, 증폭시켜 쓸 줄 알게 된 인류는 더 좋은 것을 더 편리하게 더 많이 누리고, 소유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많은 활동들이 기술개발과 에너지의 사용으로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자원이 필요한데, 지구 상의 자원은 유한하다. 또 자원이 에너지로 사용되고 난 후에는 탄소와 같이 지구환경에 해를 끼치는 부산물을 배출한다. 에너지를 만드는 데에는 자원이 필요한데, 지구 상의 자원은 유한하다. 또 자원이 에너지로 사용되고 난 후에는 탄소와 같이 지구환경에 해를 끼치는 부산물을 배출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쓰는 법을 개발해왔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인간이 에너지를 쓰는 일 또한 끝이 없다. 그 결과, 지구 자연의 무분별한 사용과 착취로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인간인 시대가 왔다.


 인류세(anthropocene)


-세(-cene)는 지질학적으로 지각변화와 생물종의 변화에 따라 구분되는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개념은 1922년 러시아 지질학자에 의해 나온 개념이나 주목받지 못하다가, 인류가 만들어 낸 기후변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2000년 노벨상 수상 화학자인  파울 크루첸 Paul Crutzen 이 인간이 지질학적 힘으로 여겨질 정도로 지구에 영향력을 끼치는 시대라고 설명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수 증가도 지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반세기 전 생물학자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손을 낳을 자유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공유자원을 누려야 한다는 믿음이 연결된다면 이는 세계를 비극적인 방향으로 가두는 결과 초래한다고 말했다. 또한, 인구문제를 걱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 누리는 특권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인구 과잉이라는 악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2012]


하딘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서, 1950년대  24억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1년 현재 약 78억 명으로 세 배를 웃돌게 증가하였다. “현재 누리는 특권” 또한 하딘의 예상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간의 이익에 필요한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한 무분별한 자원 사용과 이에 따른 탄소배출은 더 가속화되었다.

[1850-2200년 지구 평균 기온, 알렉산더 라드케, 2020]


지구는 되돌릴 수 없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속 가능한 지구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 기술의 발달로 단위 에너지당 효율성과 에너지 사용 방식을 바꾸어 자원을 더 적게 쓸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망가져 가는 지구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알렉산더 라드케(Alexander Radtke)의 지구 평균기온 변화 일러스트를 보면, 우리는 이제 지구를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유지하는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인류가 지금처럼 탄소배출을 계속할 때 나타날 심각한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인권의 관계를 연구한 조효제는 2020년 “탄소 사회 종말”에서 인용을 통해 미국, 일본, 영국, 덴마크, 연구팀의 기후변화 연구를 소개하며 온실가스를 현재대로 계속 배출할 경우 50년 내로 세계 인구 35억 명이 거주하는 지역의 연평균 기온이 사하라 사막의 가장 더운 지역과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구적 위기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더 많이, 더 편하게, 더 좋게의 욕망을 줄이면서,  서로 공유할 수 있고, 나누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나누어 사용하여 지구에 부담을 더 줄여야 한다. 또 지구에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서로 찾아내고, 알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데 동참하도록 할 수 있다. 1편에서 이야기 한 유발 하라리가 코로나 이후 필요하다고 역설한 글로벌 연대와 같은 맥락이다. 이전까지 연대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황에 따라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때 보다 지구적 연대의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우리의 연대의 경험은 자신이 믿고 지향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끼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어떤 이데올로기 나, 이즘(-ism) 또는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 소위  서로 통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연대를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도 크고 작은 분란과 갈등으로 파국을 맞은 경우가 많다. 1편에서 이야기한 나의 연대에 대한 불편도 그러한 연대에서 흔한 부정적 결말과 닿아 있다.


작은 단위의 연대도 이토록 어려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지구적 연대는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당신이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각자 나름의 지금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며, 그것을 함께 찾아 나가는 여정이 되면 좋겠기에 나부터 그동안의 생각을 글로 먼저 내려놓아 본다.

(그러니, 댓글과 이메일, 다른 글의 링크, 만남 초대 모두 환영)




우리가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연대의 시작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구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을 가능한 한 줄이고자 노력하는 한 편, 나를 비롯한 우리의 삶을 지속 가능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하는 다른 존재를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를 연대라 부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대’는 더 이상 의식 있는 몇 명이 나서서 옳고 그름을 가르는 운동(movement)이 아니다. 연대-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를 통해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으며 인간존중, 생명체 존중의 근본적인 도덕성을 확대하고, 서로 협력하여 지구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지속’ 불’ 가능해지는 지구에서 기후위기와 팬데믹의 위협을 느끼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방식(code, culture, way of life)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이 때, 연대를 작동하게 하는 것은 협력이다. 감각만 가지고 저절로 변화하는 것은 없다. 연결된 감각으로 행동하는 것, 혼자가 아니라 함께 활동해서 필요한 일이 되게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사람은 협력에 특화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서로 원한다면’ 어떤 동물보다 기능적으로 더 빠르고, 정확하게 협력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더 깊이 그리고 넓게 협력할 수 있는 이유는 지구 상 다른 생명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언어능력과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연대와 협력의 필요와 가능성을 알면서도 생각만큼 손과 발을 움직여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연대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고, 사람들이 특정 사안에 갖는 인식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는 엇갈리고, 싸우고 상처도 입힌다.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걸 까? (연대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표현함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만나고,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며, 서로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가 같은 맥락 안에 있다면, 함께 그 주제를 위해 스스럼없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거나 구할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조성될 수 있을까?  


연대는 우리가 무엇을 같이 한다는 “약속”이 아닌,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흔히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한 공동의 추구를 ‘연대한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연대하는 이유가 자신이 지지하는 어떠한 정치적 사안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미는 가치를 지지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할 때, 개인 이 취하는 관점은 달라지며, 옳고 그름을 나누는 입장이 생긴다. 그러나 함께 추구하는 가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연대는 갈라지기 시작한다.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이 했다고 전해지는 아래의 이야기는, 그러한 측면에서 연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떠한 옳고 그름(PC)에 대한 지지(도움)를 위해 함께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연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해방과 너의 해방이 연결된 문제라고 하면 한배를 타고 나아가 보는 것, 그것이 내가 믿는 연대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해 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c) 노들야학, 2021]


다시 묻는다. 연대는 가능한 것인가? 연대에 정치적 이유가 없고, 연결된 감각과 방향성이 같기는 하나 조율되지 않은 각자의 행동만 있다면, 연대는 무엇을 위한 함께 걸음이란 말인가? 연대를 통해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힘든 연대의 이유는 너무 약하지 않은가? 너무 어렵고 생각이 꼬리를 문다. 잘라내고 쉬운 생각부터 다시 밟아나가 본다. 함께 가보자.




여러 경우와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요즘 가장 가까이 있는 워크보트의 활동 중 느끼고 생각한 점을 공유한다. 연대가 필요하긴 한 거 같은데, 어렵고 모르겠어서 3개월 간 한 배에 타고, 연대와 협력을 서로 배우겠다는 이유로 다섯이 함께 모여 워크보트를 시작했을 때, 워크보트 또한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을 만들었다.


약속 하나 - 3개월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만남과 식사

약속 둘 - 연대와 협력에 대한 자신의 글 발행.


관계를 만들고 배움을 정리하는 최소한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약속에 합의 한 사람만이 배에 탔다. 그러나, 얼마 안가 우리 안에서 약속을 지키는 방식은 달랐다. 약속을 가까스로 지켰으나 정작 자신이 낸 글에 미심쩍은 상황도 있었으며, 아예 지키지 못하기도 하고, 지키기 위해서 약속 자체를 바꾸자고 하기도 했다.  


‘아…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


긴 기간도 아니고, 구성원이 모두 합의하여 미션을 위해 단 두 가지 약속만을 이야기하는데도, 3개월도 못 가 핵심이라고 정한 약속이 흔들리는 워크보트. 이래서 워크보트 선원들은 원하는 “연대와 협력에 대하여 서로 배움”이 가능할까? 이도 저도 안될 거 같고, 워크보트는 글렀을까? 이런 상황에 대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미리 계획을 촘촘히 세우나, 그럼에도 걱정은 늘 현실이 된 적이 많다.

 

‘역시… 이래서 이런 프로젝트는 안 되는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몰랐다. 전혀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나란 사람은 본디... 목표를 위해 정한 약속을 앞두고 흔들리는 워크보트를 불안과 원망의 눈으로 봤을 텐데. 그런 걸 하나도 못 느끼다가, 글에 쓸 연대와 협력의 사례가 어디 없을까, 뭐라도 끌어내 쓰려고 돌돌 거리고 있을 때 알았다. 워크보트에는 내게 공동체에 갖는 익숙한 원망과 후회가 없다는 것을.


띵.


워크보트는 이제 막 첫 번째 항해의 반이 지났다. 왜 미션에 대한 추구, 공동 행동, 약속 이행 없이도, 나는 왜 워크보트가 순항한다고 느꼈을 까?


첫째 이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워크보트를 하다 보니, 조율해야 할 사항, 나누어야 할 내용들로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온라인으로라도 얼굴을 보고, 그룹 메신저(slack)로 일상을 간간 나누게 되었다. 필리핀에 있는 부영을 제외하고는 한 달 에 한 번은 함께 오프라인으로 만나 그 사람을 이해하는 기회를 넓혔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어떤 기분과 생각인지, 얼마나 정성이고 진심이었는지를 은연중 알게 되었다. 시작할 때 지키기로 한 약속도 중요하지만, 시시각각의 변화 속에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 자연스럽게 상황에 맞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둘째 이유, “너가 소중해”

‘그럴 수도 있겠다’ 상대가 이해되니, 함께 미션을 달성하는 것보다, 지금 나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선원의 안위가 먼저가 된다. 출항할 때 서로 다짐은 했지만, 파도의 출렁임에 뱃멀미가 나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아무것도 못할 수 있도 있고, 승선 생활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빨리 하선하고 싶을 수도 있다. 반대로 배안의 다른 누군가는 출항한 배가 최적의 경로로 물살을 가르며 목적지로 쾌속 전진하는 것을 원한다. 각자의 사정과 마음은 시시각각 다르지만, 배안에서 역할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도 괴롭고, 우리의 항해가 좀 더 매끄럽고 빠르기를 원하는 사람도 괴롭다.

배를 타고 마음이 달라져 배에서 내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다. 나는 내리고 싶지 않지만, 승선 전 예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을 내리게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때 연대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승선 결정을 서로 너무 비장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하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배에서 뛰어내리거나, 구명정을 띄워 극단적으로 배를 벗어남 없이 하선을 보살 피는 것

영 바다 위에서 내려야겠다면, 하다 못해 다른 안전한 배를 만나 갈아탈 때까지 내릴 사람이나 타고 있는 사람- 서로-를 신경 쓰는(care) 것

배에서 내릴 사람이나, 계속 타고 있을 사람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


위의 내용을 선원들과 공유하고 함께인 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워크보트는 아니다 싶을 경우 돌아가더라도 다음 기항지를 가까운 곳으로 바꾸어 하선할 사람이 더 잘 하선할 수  있도록 하거나, 배를 정비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그간 배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셋째, “배는 목표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가 연결된 이유, 우리가 출항한 목표에 대한 방향성을 잊지 않는다.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의 말대로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어 우리가 만났는지 종종 되새기는 것은 중요하다. 해방에 대한 감각은 개인 적으로 다를 수 있으나, 나는 “존재로서의 자유”로 해석해 본다.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다른 데 들렀다 가더라도, 지향하는 목표·가치를 담아내기 위한 약속들을 모두 다 지키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괜찮다. 심지어 처음 그리던 이미지와 다르게 담아냈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는 시간들 속에, 함께인 선원들은 어려움에도 지치지 않는 회복력과 지속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개인이 느끼는 연결된 감각과 지치지 않음은 결국 지속되는 변화를 만든다.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항해하는 배는 우리 워크보트만 있는 게 아니다. 꼭 우리가 탄 배가 아니더라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항해하는  배는 많을수록 좋다. 선원 개인이 가진 단단함은 다른 배를 타고도 나타날 수 있고, 지향은 공유될 수 있다. 배와 배는 또 다르게 연결될 수 있다.

 

지니가 함께 먹자고 가져온 “들풀 한아름” 도시락, 우리를 힘나게 하는 것


위의 워크보트 이야기는 겪은 것 반, 겪은 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 반으로 쓰였다. 인생은 그렇게 장밋빛만이 아니듯, 공동체를 만들고 꾸리는 일에는 어려움에 한숨이 날 때가 많다. 현재까지 이어온 워크보트 활동이 달콤한 것도 현실이지만, 워크보트는 현실에서 연대와 협력의 이상적인 순간을 맛보기 위해 연대와 협력에 꽂힌 구성원들끼리 다분히 재단하고, 한계를 분명히 해 조그만 성과라도 느끼고자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싶다. 어찌 보면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현실에서 삶을 위해 연대하는 순간들은 이렇게 이상적이지 않다. 연대하는 공동체에서 맞닿뜨리는 어려움은 절절하다.   


연대가 타인과의 연결이라면, 당최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과 연결은 어떻게 만드나?   

연대의 이유로, 나를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사람은 어쩔 건가?   

승선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이 배를 여러 해 타고 온 나보고 내리라고 하면 어쩔 건가? (연대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지금껏 이 공동체에서 연대를 만들어 온 나를 부정하면 어쩔 건가?)  

연대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해를 살아온 나에게 “우리의 연대 이유”가 하늘 아래 진리가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어쩔 건가?  


벌써 다음 이야기를 써야 할 것 같다. 위 질문은 다음 편에서도 대답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생각과 느낌은 함께 공유하고 더 이어나가고 싶다. 그리고 함께 신경 써 탐구하고 행동해 보고 싶다. 워크보트 너머에 있는 당신과.



[참고문헌]

KOICA가 알려 준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021”

김영석 님이 알려 준 “마틴 노왁 & 로저 하이필드, 초협력자, 2011, 허준석 옮김, 2012”

노건우 님이 알려 준  “알렉산더 라드케, 1850-2200년 지구 평균 기온, 2020”

양석원 님이 알려 준 “리처드 세넷, 투게더, 2012, 김병화 옮김, 2013”

노들야학과 박마데님이 알려 준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의 이야기”

송은주, 포스트휴머니즘과 인류세, 2020

워크보트 승선기록,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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