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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Dec 28. 2021

책, 친구, 워크보트에 관한

회고


12월이다. 연대에 내 진심을 발휘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한 해, 2021년이었다.




봄,

이 어려운 세상 혼자는 안되겠고, 여럿이 뭉쳐 뭐라도 바꿔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야’라지만 어려울 때만 나를 부르는 거 같은 구닥다리 운동권이미지가 연대.였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기후위기, 빈곤의 대물림 같은 어려운 상황은 혼자서는 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꼭 어째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생각난 '연대와 협력'은 필요하면 훅 갖다 쓰면 될 것 같았고,  좀 안맞으면 적당히 고쳐 쓰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고쳐써야 할 지 알게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줘서 세상이 좀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와 협력에 대해서 글을 쓰고 함께 서로의 글을 읽는 프로젝트로 워크보트를 시작했다.


여름,

과연 우리로서 서로를 위한다는 것은 너무 무거웠다. 마음도 어려웠다. 글을 쓰면서 다시 보이는 세상과 주변의 사람들을 보듬지 못하고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 그냥 외면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대와 협력이라는 좋은 마음을 갖고 소탈하게 시작했으나 서로 다른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은 무거웠고 잘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겠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연대야.’ 꿈틀 힘을 내기도 했지만,

연결되어 있는 것도 다 뜯어 내고 싶은 번아웃의 심정을 느꼈다. 진심이라면서 왜 힘든건지 하고 힘들면 때려쳐야 겠다 싶었다. (그 뒤로 마침 첫번째 출항을 끝내고 방학을 맞았다)


가을, 

쉬어보니, 또 다시 슬렁슬렁 연대를 위한 도구와 준비자세를 찾게 되었다.

‘동등함, 다름에 대한 이해, 고유성에 대한 진심의 존중’

두 번의 계절동안 나와 남의 머리와 마음을 뒤지고 뒤져 찾은 단어들로 어렵게 꿴 연대와 협력의 단어들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뭐 이미 아는 말 아니었나 싶어 허탈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와 나의 행태가 꼭 같았을까?


겨울, 

글을 쓰면서 막연히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많이 깨졌다. 흐르는 생각과 마음들이 글로 새겨질 때의 무서움이 있다. 글자라는 각지고 (심지어 셀 수도 있는) 정형으로 표현된 실체는 제한적이지만, 담백한 진실이 담겨 있게된다. 무섭게 자각하게 되는 느낌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는 다른 사람이 차등하다고 느끼도록 행동하며, 다름에 대해서는 이해한다고 느끼지만 꾸역 받아 들이고 있을 뿐이며, 그러기에 피곤해서 가능한 짧게 마주치려 하고, 고유성은 존중하지만 까끌하고 일을 더디게 해서 같이 일하고 싶지는 않은 경우가 많구나…’



그렇게 일 년이 갔다. 회고해 보면, 연대하고 협력한다고 해놓고는 놓지도 못하고, 척척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것  같은 한 해다. (어디 연대뿐이겠나)  


가만히 지금의 느낌을 느껴본다.

굳이 비슷 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예전에 버스카드가 아직 없던 때,  오락실에서 동전을 수도 없이 집어 넣고 집에 갈 차비도 남지 않았을 때, 게임 끝 헤아려 지는 휑함과 막막함. 연대와 협력에 대한 내 비루함을 알았고, 그걸 생각처럼 가져다 쓰기에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았고, 뭣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은 같다. 그런데 어째 휑하고 망막하고, 그런 마음은 안든다. 마음이 움츠러 들기보다는 어떤 에너지로 더 손을 뻗어 품을 늘려보게 된다. 조금더 잇고 싶다. 분명 마음속 밑바닥까지 있던 탁한 물까지 퍼내서 쓴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우물 속에 에너지가 도로 찬 거 같다. 이 도로찬 에너지에 대해서 쓰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글의 송고 기한은 다되었는데 쓸 말이 없어서 잠이 오지 않는 밤, 움직이지 않는 커서를 동동이고 있을 때 알았다.


책, 친구, 워크보트 때문이다.


정신 없이 닥친 일을 하고 있을 때, 습관처럼 쥐고 읽게 되었던 책들.

답답할 때 나 답답해요. 믿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이밀 수 있는 친구들.

함께 글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워크보트.


책, 친구, 워크보트가 내게 가지는 공통점이 헤아려질 때 그 한 밤 '와우. 과연 그랬구나!'에 나도 놀랐다.


'나' 여도 된다.

 

아니, 책, 친구, 워크보트는 끊임없이 내가 나일 것.을 끈질기게 종용하였다. 부드럽게, 그러나 내내 쉼없이.

책, 친구, 워크보트 앞에서 나는 므흣해 하기도, 울컥하기도, 엉엉울기도 하면서 나는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내가 나인 것을 각자의 호흡과 방식으로 호응해 주는 느낌. 책, 친구, 워크보트는 지난 1년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표현하는 일들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알기만 하는 것과 진짜 그런 것은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게 했다.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다. 충분히 생각하고, 삶의 안전함을 느끼며, 내가 느끼는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는 여러 번 회자되었던 구절이라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자기만의 방은 다르게 읽혔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이유, 그리고 그 연설문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우리가 ‘나만 그래선 안된다. 남도 그래야 된다.’라는 것에 힘주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신기하지만 당연한 사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고, 생명력을 갖는다. 그런 의미로 자기만의 방을 읽었을  즈음 '당신을 이어 말한다' (이길보라).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안미선). '슬픈 세상의 기쁜말' (정혜윤)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이미 힘들게 꺼낸 나의 말을 이어 이야기해 주기도, 들어주기도 하고, 글로 써 이야기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는 작가들의 이야기였다.


오묘한 타이밍이었다. 세 책이 말하는 바가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한달에 한 번 세상에 어떤 글이든 박제될 글을 내놓는 다는 약속으로, 워크보트를 통해 내가 내 목소리를 또박또박 찍어내놓기 시작할때 였으니. 내 목소리를 내놓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던 건, 그때 나에겐 누가 관심 갖지 않아도 적어도 매달 따박따박 읽어주고 반응해준 워크보트,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글을 쓰는 이제사 알았다. 그렇게 20201년 책, 친구, 워크보트의 묘한 동시성이 이렇게 내 목소리를 내는 것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했다.


당싱을 이어 말한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슬픈 세상의 기쁜말


들리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찾아서 애써 듣고, 내 목소리로 이어야지 싶다. 하지만 지금 마음은 진짜 원함 보다는 ‘알았으니’ 해야겠다는 책임감에 가깝다. 이야기를 이야기 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 모두 에너지가 든다. 에너지가 계속 나오려면 체력과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니 섣불리 '듣고 싶다',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지 말고, 지금은 이렇게 써놓기만 해야 겠다. 지금은 그냥,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들이 끝이 없어 어디가 시작인지 모를만큼 이어지면 좋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진짜 울림을 주어 이어지는 것을 바란다.


더 공들여보자.


2022년이 온다. 반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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