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가 기억났다

#4

by 마릴라 Marilla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온다. 지난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더니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인 지금도 며칠씩 연달아 비가 온다. 비를 좋아하지만 장마처럼 과한 날은 흐린 하늘처럼 마음도 우울한 표정이 된다. 정오인데도 해질녘같은 침침한 방에 불을 켜지 않고 베란다 문 앞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집중하지 못한 채 몇 장 읽는 동안 딴생각이 찾아왔다. 그 순간 알아챘다. 지금 책을 읽는 건 합리화를 위한 거구나. 우울함에 종속되지 않고 책을 읽었다고,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심리적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거구나.


문득 13년 전이 떠올랐다. 하는 것마다 다 막히던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환경을 바꿔보는 것인데 전셋집이 나가지도 않고 이사할 집도 없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전세금은 세입자가 들어오면 나중에 받기로 하고 대책 없이 본가로 이사했다. 잠시만 있으려던 계획이 무력하게 1년간 본가에 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사하고 싶은 집은 없고 일자리도 없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은 초조함을 만들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은 정확하다. 오전에는 재봉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요일마다 다른 인문학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에 있을 틈없이 지냈다.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고 매일 책을 빌려다 읽었다. 그때 쓴 다이어리에는 스케줄 많은 사람처럼 매달 일정이 빼곡했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데 스스로 눈치를 봤다. 독립심 강한 사람이 부모 집에 얹혀 있는 게 불편해 알아서 집안일을 하고 수시로 움직여 가만히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제과점에서는 월급을 주지 않은 채로 폐업을 진행하는 등 악재가 더해졌다. 다이어리에 빼곡한 내 일정을 보며 온전한 회사에 재취업은 못했지만 열심히, 건설적으로 살았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 후로 몇 년 뒤, 문득 꺼낸 다이어리를 보고 서럽게 울었다. 매월 빼곡한 일정표 페이지 한쪽에는 내가 읽은 책의 권수와 제목이 기록되어 있었다. 매달 1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많은 수업을 찾아다니며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뭔가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때는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고 나를 다독였는데 멀리 떨어져서 보니 내가 나를 학대하고 있었다. 고작 명함 하나 없다고, 성인에게 돈벌이가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취업을 못했다는 사실이 싫어서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메꾸고 있었다. 절대 게으르게 누워있지 않았다고, 열심히 자기개발을 하고 나를 발전시켰다고 합리화했다. 마음까지 속여가며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는데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2012년을 떠올리면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과 달리 마음이 힘든데도 내가 외면했던 슬픔이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마음만 괴로웠으니 체력으로 활발하게 움직였으나 지금은 몸과 맘이 같은 편이 되었는지 우울과 무기력에 짓눌려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여전히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움직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책이라도 읽었으니 나는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당위를 만들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처럼 마음에 물이 가득 찼는데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아픈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