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만기 즈음에

#12

by 마릴라 Marilla

전월세 계약은 2년 단위로 이뤄지니 보통 2년을 살거나 묵시적 갱신을 통해 연장해서 산다. 2년은 긴 기간이지만 세입자에겐 다른 시계가 움직인다. 맘에 드는 집이란 유니콘 같아서 현실에선 만나기 어려우니 웬만하다면 한집에서 오래 살려고 한다. 세입자가 자주 바뀌는 것도, 매번 집 알아보고 옮겨 다니는 것도 양쪽 모두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세의 인상이나 중요한 하자, 돌발 상황이 생기면 계약기간 안에도 이사해야 하는 변수가 생기는 게 세입자의 삶이다. 세입자 생활 만렙에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변수는 무한대로 생긴다. 이 집에 아직 적응도 못 한 것 같은데 벌써 만기 3개월 전이다. 이사를 하려면 지금 통보하고 집을 알아봐야 한다. 6개월 전부터 미리 이사 걱정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여러 달째 지속되는 허리 통증과 잦은 증상에 무기력증으로 내 몸 하나 일으키는데도 지구를 드는 것처럼 힘이 드는데 이사라는 인생의 크고 어려운 숙제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몸은 자동 연장해서 그냥 있으려 하고 마음은 자꾸 이사를 하자고 대립하는 상황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몸은 말한다. 이사를 하려면 체력을 써야 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몸 상태가 나빠질 수 있고 건강의 변수는 큰돈이 오가는 이사에 치명적인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고. 마음이 말한다. 1년 사이 불행의 연속처럼 아픈 증상이 몰려오고 안 좋은 일이 생기니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이사를 통해 조금씩 움직이며 변화를 모색해 보자고. 나는 양쪽 모두의 심정으로 ‘그래, 이사 가자’ 했다가 ‘아니야, 아무것도 못 하겠어’를 반복하고 있다. 그저 무기력하고 아파서 이사가 고민되는 것만은 아니다. 세입자 생활 만렙에 수많은 변수와 하자를 겪었는데도 아직 멀었다는 듯 새로운 체험을 여기서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1년에 이사를 네 번이나 했다. 2년에 한 번 이사도 힘든데 두세 달마다 이사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3개월 내내 집을 못 찾아 힘들었고 날짜 임박해서 겨우 이사한 집에서는 한 달 동안 집 정리를 끝내고 나니 벽에 이상한 물이 들고 사방에 곰팡이가 올라오는 치명적 하자가 생겼다. 다른 집을 구할 틈도 없어 본가로 이사했다가 두 달 뒤 다시 이사한 집에서도 한 달이 안 되어 바닥에서 물이 올라오고 난방이 되지 않았다. 겨울 초입이고 큰 공사가 될 수 있다며 집주인은 다른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이미 여러 달 동안 집을 못 찾았는데 어디서 또 집을 찾으란 말인가. 너무 지치고 아무런 기운이 없어 그냥 버티고 싶었지만, 집주인은 어서 집을 구하라고 재촉했다.


갈 곳 없는 서울에서 집을 못 찾아 지방까지 범위를 넓히다가 매물 사진 하나 보고 온 곳이었다. 맘에 든다기보다 집이 넓고 볕이 잘 들고 작은 꽃밭이 있는 게 좋아 계약했다. 그렇게 한 겨울에 이사를 왔다. 냉골에서 지내다 감기에 걸린 상태였는데 이사 첫날, 난방이 잘되고 외풍이 없는 따뜻함에 위로받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살게 되길 바랐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밤, 갑자기 집안의 모든 전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거실의 등, 중문의 센서 등, 현관의 센서 등, 스탠드와 냉장고 내부 조명까지 불이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요란하게 깜빡거렸다. 형광등이 수명을 다할 때처럼 어느 하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동일하게 그랬다. 늦은 밤이라 집주인께 전화도 못 하고 어둠 속에서 지냈다.

다음 날 전등이 다시 멀쩡해졌다. 집주인이 부른 업자가 와서 보긴 했으나 당장 뭘 해주진 않았다. 한전에 요청해 점검을 받았으나 한전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차단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해서 차단기 회사에도 문의했다. 그 뒤로 문제가 없다가 반년이 넘어서 다시 같은 증상이 시작됐다. 즉각 집주인에 전화해 문제 상황을 확인시켜 줬다. 급하게 업자가 와서 집주인 계량기에 임시로 연결했다가 며칠 뒤 전기선을 새로 이어 거실 벽을 뚫고 차단기에 연결했다. 느닷없이 욕실 타일이 떨어져 큰일 날 뻔했고 한겨울에 보일러 배관 누수로 바닥을 뜯기도 했다. 벽면 결로를 잡지 못해 안방 벽이 곰팡이로 물들고 잦은 비에 천장 누수까지 추가되었다. 주기적으로 업자가 드나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하고 싶은데 온몸이 통증에 시달리느라 집을 알아보는 게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2년 전의 상황이 다시 반복될까 두렵고 집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이사를 결심하기도 그냥 살기도 마음 편치 않은 상황이 싫었다. 과연 이사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