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꿈을 꾼 날

#11

by 마릴라 Marilla

빨간 날 특집인 명절을 싫어한다. 평소에도 빨간 날을 싫어하는데 명절에 공휴일이 겹쳐 황금연휴가 될 때면 우울한 날이 된다.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있다 보면 생활 리듬이 깨지고 밤낮이 바뀌고 그 틈에 우울함도 눌러앉는다. 생각 없이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다가 새벽에 잠들고 낮에 눈을 떴다. 잠결에 꿈을 꿨는데 그 꿈에도 우울이 묻어있는 것 같아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눈뜨자마자 지난 연말 만들어 현관에 걸어둔 리스를 해체했다. 유칼립투스잎과 솔방울을 떼어내고 소원처럼 바람을 넣어둔 작은 유리병을 열어보았다. 작년에 난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올해 내 심신을 고려할 때 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전화기를 보니 아침에 도착한 친구의 문자가 있었다.


“긴 연휴 잘 지내고 있지? 오늘은 날씨가 좋을 듯. 좋은 하루 보내~”

꾸준히 나의 안부를 챙기는 고마운 친구다.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터널을 헤맬 때도 친구는 꾸준히 문자를 보내 나의 안부를 챙긴다. 혼자 남은 행성에서 눈을 뜨자마자 몰려오는 허무함과 소원 메모를 보고 난 뒤의 허탈함이 묻은 답을 보냈다.


“난 밤낮이 바뀌어서 이제야 일어났어. 싫어하는 명절에 할 게 없어 리듬이 꼬였네. 일어나서 연말에 너랑 같이 만들었던 리스를 해체했어. 유리병에 뭐라고 썼었나 봤는데 ‘그러려니 넘기는 삶, 평온한 일상’이었더라. 참 소박한 건데 이것도 거창한 소원이구나 싶더라. 올해 내내 아프고 많은 일이 있었으니…. 오늘도 낯선 꿈을 꿨어.”

“생각할수록 더 많아지는 게 생각이라는 말도 있잖아. 가끔 멍 때리기도 좋을 듯!”


“……”


누가 일부러 자신을 괴로운 생각 속으로 밀어 넣을까. 멍 때리기로 결심하면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 않아도 걱정과 괴로움이 수시로 틈타서 힘든 사람에게 친구는 그리 말했다.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나는 친구에게 말하고 공허함을 느끼기를 반복한다. 긍정적인 언행을 하려고 노력하는 친구는 내 걱정 어린 문자에 자주 “힘내”라고 보낸다. 나는 그 말을 참 싫어한다. 반복되는 그 응원에 발끈한 적도 있었다.

“너는 뭐든 긍정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 지친 사람에게 기운 내라는 말이 얼마나 힘 빠지는 말인지 모르는구나. 오히려 그 말이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거야. 그냥 그렇구나 하면 돼.”




워킹 맘인 친구는 아이가 자신의 말에 영향받는 것 같아 더 그렇게 말하게 된다고 했다. 나의 힘듦을 알기에 주기적으로 챙기는 고마운 친구지만 그 말이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의 좌절과 고난 앞에서 기운 내라거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의지가 약한 거라고, 젊은데 못할 게 뭐냐고, 정신력의 문제라 말한다. 나도 힘들어 봤다고,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남의 상황을 쉽게 일반화하는 그들은 덜 아파본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게 뭐 힘든 거냐고, 더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고. 마치 불행 배틀에서 우승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살만할 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우울한 감정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 때나 하는 말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절대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누구나 공감하고 위로할 순 있지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순 없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세상 끝자락에 혼자 선 듯한 누군가에게 함부로 조언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나약하고 의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리가 부러져 누워있는 환자처럼, 개복수술을 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처럼 외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에 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멀쩡한데 왜 그러고 있느냐’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스스로 열심히 견디며 투병 중인 이에게 폭력을 가해 더 오래 누워있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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