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몇 해 전, 누워서 휴대전화로 TV를 보다가 깜빡 조는 사이에 연결된 이어폰 줄에 눈을 맞은 적이 있다. 눈두덩이를 살짝 맞았는데 다음 날 저녁에 갑자기 눈앞에 핏덩이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안과에 가서 시력 측정을 하는데 안경을 써도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큰 글자도 뿌옇게 보였다. 교정시력이 반대쪽 눈은 1.0인데 다친 눈은 0.5로 나왔다. 수정체가 혼탁해졌고 떠다니는 물체가 뒤로 가길 기다려야 된다며 한 달 치 영양제를 처방해 주고 지켜보자 했다. 복용하는 동안 핏덩이가 작아졌을 뿐 안개 낀 상태는 계속되었고 그 상태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한쪽 눈이 나빠지면서 반대쪽 눈의 시력도 점차 떨어졌다. 높은 도수의 안경 생활도 서러운데몇 달 전부터 작은 글자가 번져 보이기 시작했다. 시력이 떨어지니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엉성한 사람이 된다. 발바닥에 붙였던 테이프가 살색이어서 덜 떼어낸 것도 모르고 이틀 뒤에 떼어내면서 잘 안 보인다는 건 참 불편하고 서럽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누군가가 떠올랐다.
어릴 적, 초등학교 때 동네 골목에서 소꿉놀이하던 친구 중엔 명희 언니가 있었다. 언니와 그 여동생 둘, 동네 친구들과 옹기종기 앉아 밥 짓고 반찬 만들어 나눠 먹는 놀이를 종종 했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다가 고학년이 되어 특수학교로 전학한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인데 초등학교 때 이미 돋보기처럼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고 그러고도 글씨가 안 보여 책을 코앞까지 바짝 대고 한쪽 눈으로 봐야 했다. 신체 건강하고 말도 잘하는데 눈이 안 보여 칠판 글씨를 볼 수 없어 학교수업을 따라가기 힘드니까 전학 가야 했나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함께 노는 동네 친구였으므로 우리는 같이 교회도 가고 놀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동네에 아파트를 사서 언니네가 이사 가고 그 후에 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축 아파트로 이사해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가 스물이 되던 해,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언니를 보았다. 은행 앞에서 바닥에 좌판을 깔고 편지봉투 묶음을 팔고 있었다. 이제 돌이 지났을 법한 사내아이를 안고서.
놀란 마음에 달려가 말을 걸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해? 결혼한 거야? 아기도 있네?”
“어머! 오랜만이다. 만나서 너무너무 반갑다. 얘는 둘째야. 첫째 딸은 집에 있어.”
“그런데 왜 어린애를 데리고 길에 앉아 있어?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밥 먹으러 가자.”
점심때가 지났는데 밥도 못 먹었다는 언니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대화를 나눴다. 만나지 못한 사이, 언니는 결혼해 도시 밖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그려졌다. 언니가 시력이 나쁜 건 알지만, 등록 장애인지는 모른다. 특수학교를 다녔으니 장애인의 삶을 살았겠다고 짐작할 뿐이다. 다른 나라 상황은 모르겠으나 한국은 선천적 장애가 있는 경우 대체로 장애인과 결혼한다. 언니가 성인이 되자 부모님은 장애가 있는 남자와 결혼시켜 딸을 출가시켰다. 비장애인이 자신의 의사로 결혼하는 것과 달리 부모의 의사인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신체 건강한 언니가 나가서 뭐라도 하게 된 상황으로 보였다. 언니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결혼해 부모, 며느리의 역할을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착한 천성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대화하며 슬펐던 장면은 언니가 아들의 기저귀를 가는 모습이었다. 입고 있던 기저귀에 언니의 긴 머리카락 여러 가닥이 붙어 있었다. 언니는 잘 보이지 않으니, 머리카락이 붙은 것도 몰랐고, 말 못하는 아이는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러워 울기도 했을 텐데 상황을 알지 못해 우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거나 달래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저시력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습을 생각하니 언니도 아이도 안쓰러웠다. 모르는 동네로 시집가서 친구도 없어 많이 외로웠다며 자주 만나자며 좋아했다.
나는 언니가 어떤 마음일지 감히 짐작되어 좀 슬펐다. 어릴 때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을 보게 된다. 아무리 어려도 특징적인 점들과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언니네 부모님은 어린 4남매를 데리고 큰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할 정도로 돈을 모은 분들이다. 남다른 성실함도 있지만 눈에 띄었던 건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언니는 장녀고 둘째가 아들이었는데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것처럼 아들에게는 과외를 붙이고 귀하게 대하는 반면 딸들은 집안일을 시키고 똑같이 대우하지 않았다. 내가 방에 들어갈 때 방턱을 밟았다고 혼내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살림 밑천으로 대하면서도 눈이 안 보이는 큰딸은 차갑게 대했다. 아들과 같은 관심을 받았다면 언니는 특수학교에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부모가 하는 모습 그대로 남동생과 여동생도 아랫사람 대하듯 장녀에게 버릇없이 행동했다. 언니는 천성이 착한 사람이어서 화 한번 내지 않고 시키는 대로 집안일을 했다. 그런 언니가 숙제라고 여겼던지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먼 곳으로 시집을 보내 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가 멀리 이사하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겨 소식은 알 수 없지만 가끔 언니네 부모님이 사서 이사한 대로변의 아파트를 지나칠 때나 동명이인을 만날 때면 문득 생각난다. 자녀들은 장성했을 텐데 그 아이들이 엄마를 위하고 있을지, 가족이 있지만 여전히 섬처럼 외롭게 살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 되었다. 잘 안 보여 놓친 내 발바닥의 테이프를 떼어내다 언니가 생각났고, 엄마가 생각났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서러워 펑펑 울었다. 어릴 때는 즐겁던 장면이 어른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슬픈 추억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내 소꿉친구 명희 언니가 어딘가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