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상담 다음날부터 다시 마음이 힘들기 시작했다. 발바닥의 테이프를 떼다가 생각난 명희 언니의 기억은 결국 엄마까지 소환했다. 엄마의 기억은 내 어린 시절까지 찾아가 결국 나를 괴롭혔다. 전날 상담에서 이젠 엄마와 가족에 대한 분노나 미움은 없고 각자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마음은 진심인데 다시 그 기억이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명희 언니는 약자였고 자신의 의사가 아닌 부모의 의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선량한 약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위해선 누군가를 믿어야 했고 그 믿음이 상처가 되어 계속해서 약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엄마의 인생을 어릴 때부터 봐왔기에, ‘엄마는 불편한 사람이니까 딸인 네가 도와야 한다’라는 부친의 말을 시작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아이로 자랐다. 여느 모녀와 다른 특수한 상황은 어린 꼬마를 자립적이고 책임감 강한 아이로 만들고, 착하고 이용당하는 엄마를 보호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엄마를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언니의 인생도, 엄마의 인생도 안쓰러워 울었다가 어린아이가 뭔지도 모른 채 큰 짐을 지고 자란 게 더 안쓰럽고 그 시절의 내가 보여 통곡했다. 상처인지도 모르고 자란 그 아이의 잔상은 주말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생각이 불쑥 찾아와 나를 힘들게 할까 봐 매일 수업이던 공연이던 일정을 만들어 바쁘게 살았는데 어쩌다 일정이 없는 그 하루에, 괜찮아졌다고 안심하던 찰나에 느닷없이 나타나 조롱하듯 나를 괴롭혔다. 친구와 주말에 저녁을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며 나를 잘 달랬다고 생각했지만, 밤이 되고 잠이 오지 않는 틈을 타 기억이 나를 불러냈고, 이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설움에 받친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예전 같으면 엄마를 부르면서 울었을 텐데 고아가 되어 부를 엄마 없이 울고 있구나 싶어, 내 울음소리가 서글퍼 더 눈물이 났다. 다시 원점인가. 상담 전에 느꼈던 우울과 불안감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젖은 얼굴로 잠들었다가 다음 날 청소하고 빨래하고 도서관에 가서 반나절을 보냈다. 모든 불안은 방심한 틈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늘 뭔가를 하고 대비하듯 산다. 이 곤고함은 내 삶의 기본값인가. 아니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