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에 이름 적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부동산에서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뒤쪽 소파에 혼자 앉아있는 엄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엄마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으셨고 얼굴 전체가 핑크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부동산에서 시키는 대로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하면서 또다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소파에서 꿈쩍도 안 하셨다.
이상했다. 당연히 엄마가 내 옆에 와서 같이 계약서 내용을 확인해 줄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 역시 "엄마, 여기 와서 이것 좀 같이 봐줘"라고 말할 용기가 안 났다.
내 앞에는 부동산 중개인, 옆에는 매도인 아줌마가 앉아있었다. 빨리빨리 넘겨지는 계약서를 쳐다보며 옆에 동생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엄마랑 이 집을 둘러봤을 때 집 상태가 너무 깔끔했다.
매도인이 우리가 보지 못한 화장실의 타일에 금이 났다며 집값에서 얼마를 빼주기로 했다.
5년 전에 했다고 한 인테리어는 아직도 상태가 좋았고 굳이 집에 손을 대지 않고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중문과 새시도 다 갖춰져 있었다. 베란다 창문 밖으로 한쪽에는 아파트가, 다른 한쪽으로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내려다 보였다.
빽빽한 다른 단지와 달리 한쪽이라도 뚫려있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1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가을 단풍도 너무 이뻤다.
이 집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여러 장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온 신경이 "계약서 내용"보다 엄마로 향했다.
엄마는 뒤에서 잘 듣고 있는 걸까?
이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동산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날이었다.
엄마랑 다른 동네에서 하루 종일 여러 집을 보다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러다 보니 좀 지쳐있었는데 마지막에 본 이 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집을 보러 오기 며칠 전,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이 동네에 미리 와보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니 15분 정도 걸렸고 무엇보다 단지에 나무가 많은 게 마음에 들었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몇 주 동안 봐온 여러 동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
집 내부를 확인하고 예산에만 맞다면 이곳으로 해야지, 마음을 먹고 돌아갔었다.
집을 다 보고 부동산 사무실에 돌아가면서 엄마한테 이 집으로 하겠다고 했다.
제일 마지막 집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보러 갈 집을 다른 분들이 방금 보고 간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괜히 조바심이 났다. 부동산 아저씨도 계속 이 집이 제일 괜찮다고 부추기셨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떠나서 그동안 봐온 수십 개의 집중 마지막 집이 내가 원하는 조건과 제일 잘 맞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와는 달리 엄마는 오늘도 가볍게 둘러만 보는 줄 아셨다.
이날 내가 이날 계약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하셨다.
딸이 덜컥 집을 사겠다고 하자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갑자기 밖으로 나가셨다.
부랴부랴 동생한테 전화를 걸어서 누나가 오늘 본 이러이러한 집을 산다고 하는데 괜찮겠냐, 하고 물어보셨다.
그 목소리가 부동 산안에까지 다 들렸다. 동생이 엄마한테 카톡으로 집 사진이랑 단지 평면도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부동산에 부탁해서 평면도만 간신히 보냈다.
멀리 있는 남동생은 이 상황이 좀 답답했었나 보다. 전화를 받는 엄마의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엄마가 동생이랑 한참 동안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동산 아저씨가 엄마가 왜 동생한테 확인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해하셨다..
그러고 보니 집을 사는 것도 나고, 집에 들어가 사는 것도 나인데 엄마는 아무래도 동생에게 확인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동안 엄마,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세명이 항상 집을 보러 다녔다. 아무래도 엄마랑 나보다는 동생이 경험이 많아서 우리가 의지를 많이 했는데 이날 하필이면 약속이 있어서 같이 못 왔었다.
집 계약을 혼자 결정하기에는 이 모든 게 처음이라 나 역시 엄마의 확신과 동의가 필요했다.
"엄마, 여기로 할까?"에서 "그냥 여기로 할게"라고 바뀌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괜찮다면 그렇게 해야지"
계약서에 사인을 다 하고 부동산을 나왔다.
엄마에게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적은 금액도 아니고 억 단위가 왔다 갔다 하는 건데 딸이 덜컥 집을 사겠다고 하자 당황했다고 하셨다.
그러는 와중에 멀리 있는 동생이 짜증을 내니 갑자기 위경련이 났다고 하셨다.
빨리 엄마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동안 봐온 집 중 위치, 예산이 제일 좋아서 결정한 거고 며칠 전에 왔을 때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을 드렸다. 인테리어 때문에, 부동산 아저씨 때문에 결정한 건 아니었다고. 그제야 엄마는 알겠다고 하시며 표정이 살짝 밝아지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제 본 집의 사진을 안 찍은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갑자기 온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