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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pr 03. 2023

곧 지나갈 감정을 마주할 용기

이 감정도  지나갈 것.



어떤 주문처럼 이 말을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호흡을 길게 마시고 내뱉으면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된다던데, 그래서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기도 했다.


토요일 오전, 헌 옷을 가방에 한가득 담고 아름다운 가게로 갔다. 이번주에는 기필코 옷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침에 후다닥 준비를 하고, 제일 편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길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보였다.


아, 너무 아름다웠다.


활짝 핀 벚꽃은 반가웠지만 내 마음은 고군분투 중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감정이 콕 박혀 들어와 앉았다.

 





출장을 다녀와서 거래처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를 받고 담당자로써 이 관계를 잘 이끌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사무실에 복귀 후, 어떤 프로젝트에서 거래처와 회사와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게 되었다.


결국 회사에서 거래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했을 때 내 심장은 콩닥콩닥 띄었다. 차라리 출장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이메일로 깨끗하게 통보를 했을 텐데.


얼굴도 모르는 사이이니 부담 없이 "노"라고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안면을 튼 사이여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신을 미루고 또 미뤘다.









"우리는 그냥 우리 자신을 로봇이라고 생각하고 일해야 할 것 같아"


이 상황을 같은 업계의 지인에게 얘기했더니 감정이 섞이면 일을 처리하는 게 힘들다면서 차라리 우리 자신을 감정이 없는 AI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아,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당장 이 거래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되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담당자가 수시로 메신저로 나에게 문자를 보내며 상황을 이해해 달라, 이 요청을 들어달라 간곡히 요청을 해댔고 나는 회사의 입장이 아닌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러니까 그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가 걱정이 되어서 불안했던 걸까?







회사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한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다.


"굳이 손해를 보면서 장사를 할 이유는 없는 거야"라는 또 다른 조언을 들으면서 난 역시 영업이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를 다시 한번 느꼈다.  








출장을 다녀와서 한동안 이메일을 체크하는 게 두려웠다.  



윗선에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단호하게 거절을 당했을 때, 뭔가 무안하면서도 마음이 참 쓰렸다.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시키기에는 내 능력이 한없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을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서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 이 감정도 곧 지나갈 거야, 지나갈 거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내 마음에 주문을 걸었다.



회사일은 회사일 뿐이야.

너무 많은 감정을 쏟지 말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피하고 싶지도 않았고 매몰되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불안한 감정은 쑥 나타났다 어느새 없어졌었다.  







업무를 하다 잠깐 밖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


주말 내내 동요되었던 마음은 한결 잠잠해졌다.


아, 역시 그 감정은 지나갔구나, 다행이다.






아직도 한창인 벚꽃이 지기 전에 마음껏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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