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실업급여

이제는 스스로 내 안전장치를 만들어가야 할 때

by 마리

"10월 15일(목) 당일 00시부터 17시까지 고용보험사이트를 통해 실업인정신청서를 전송하시거나

센터 방문하여 구직활동 내역 신고하세요"






고용보험센터에서 문자가 왔다. 5월부터 지급받기 시작한 내 실업급여는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퇴사는 했지만 매달 내 은행계좌로 입금되던 실업급여는 돈을 벌고 있지 않아도 계속 월급을 받는 느낌이 들게 해 주었다. 모아놓았던 돈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었기에 그동안 들어오는 실업급여는 마음속 안전장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실업급여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쿵하며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서 나는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출근했고 퇴근을 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취업이 너무 안되었고 백수생활을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 다시 취업이 되었고 이전의 막막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입금된 월급을 확인하면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이 돈을 회사 밖에서 내가 어떻게 벌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안했고 어떻게 해서든 버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이 나를 견디게 했다.



다니던 회사에는 회의가 정말 많았다. 내가 말하는 회의는 회의가 아닌 일종의 보고 시간이다. 월요일 오전, 출근하자마자 회의실에 12명 인원의 부서 전체가 모인다. 주말 전 금요일에 이미 보고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서장에게 같은 내용을 다시 보고한다. 화요일 오전, 사장과 부서장이 참석하는 회의실에 모두가 다시 모인다. 직원들은 앵무새처럼 이미 보고 했던 내용을 똑같이 읊는다. 오전 9시에 시작된 보고는 기본 2시간이 넘어야 끝나곤 했다. 목요일 오전, 이틀 사이에 혹시라도 있었을 변동사항에 대해 회의실로 직원들이 다시 소집된다. "사장님, 부사장님, A 거래선에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런 요청을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면 그들이 결정을 내려준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모든 건 직원 잘못이 되어버리고 만다. 금요일 오후, 부서 전체 카톡에 부서장이 몇 시에 회의를 할 테니 모이세요라고 톡을 하면 우리는 일주일 동안 거의 같은 내용만 적혀있는 주간보고서를 들고 또 회의실로 향했다.




사장과 부서장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그날의 분위기가 왔다 갔다 했다. 회의 시작 전 직원들은 보고 내용을 노트에 적어서 보고용 말투를 연습했고 최대한 회사를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고 열정을 다해 일을 하고 있는지를 어필해야 했다. 그만큼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회의, 아니 보고 시간이었다. 그들은 사실대로 보고를 하는 직원을 믿지 않았고 인격 모독, 폭언 그리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회의 시작 전 나는 항상 긴장이 되었고 쓴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온 에너지를 쏟아부은 회의가 끝나면 몸에서 힘이 빠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해외에서 바이어들이 회사를 방문하면 우리 부서 사람들은 회사 옥상정원에서 셰프복을 입고 서빙을 했다. 바비큐 파티가 있던 날, 남자 직원들은 찌는듯한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구웠고 여직원들은 주방에서 야채와 과일을 씻었다. 와인잔에 손자국이라도 남으면 큰일이 나기에 햇빛에 잔을 비춰가며 잔을 닦고 또 닦았다.


어떤 직원이 레드와인을 얼음 버켓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알고 사장이 고래고래 직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바이어의 와인잔이 비어있어서 따라주려고 테이블로 갔는데 갑자기 부서장이 나를 불렀다. 어떤 와인이 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따르면 어떡하냐며 와인은 섞는 게 아니라고 나를 향해 큰소리를 쳤다. 나는 당황해서 바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앉아있던 바이어는 미안해하며 내가 따라주는 걸 마시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외국 바이어들 앞에서 셰프복을 입고 부서장에게 서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시 웃으며 바이어 와인잔에 술을 따랐다.




사장은 직원들을 주시하고 있다가 한 명씩 불러 바이어 옆에서 제품 홍보를 제대로 하라며 닦달을 했고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바이어와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고 있다는 걸 "연출"해야 했다. 그 시간이 나는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며 고기를 서빙하고 맥주를 갖다 주고 반찬을 날랐다.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이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직원들은 남아서 뒷정리를 했다.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렸다. 정리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직원들은 눈치를 보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고 나도 퇴근을 하려고 준비했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런데 사장은 다시 회사 브로셔를 가방에 싸서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했다. 누군가 다행히 미리 준비를 해놓았었고 우리는 인사를 하고 드디어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다녔던 회사 중 유독 마지막 회사에서의 1년은 10년 같았다. 계속 그곳에 있었다 해도 바뀔 건 없었을 것이다. 매달 월급이 들어온다 해도 그 월급이 얼마나 나의 안전장치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퇴사 후 6개월 동안 그래도 마음속 기댈 곳이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내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나가야 할 때이다. 걸음이 더딜지라도 스스로 뭔가를 시도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회사에서 회의에 들어가기 전 느꼈던 긴장감과는 완전히 다른 긴장감, 이런 느낌은 얼마든지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