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실업급여가 드디어 입금되었다.
당분간 수입이 없는 내 계좌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빠져나갈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아침에 들으려고 계획했던 온라인 강의를 뒤로 미루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뭘 입고 나가야 하나 망설이다 몇 년 전 일본 교토를 여행할 때 빈티지샵에서 3만 원을 주고 산 체크무늬 재킷을 입었다. 돌아올 때 쌀쌀할 것 같아서 다이소에서 산 장갑도 챙겼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서점이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얼마 전 낸 신간소설의 내용이 몹시 궁금했는데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그 책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용만 짧게 훑어보려고 했는데 매번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소파에 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바로 돌진했고 그리 두껍지 않은 소설을 편하게 앉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책을 더 읽어볼까 하다 며칠 전 동생이 준 무료 커피 쿠폰이 생각났다. 마감기한은 오늘까지였다. 마침 쿠폰을 쓸 수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서점 근처에 있어서 책을 제 자리에 놔두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동생이 준 쿠폰에는 7,600원이 남아있었다. 매일 먹는 커피 말고 색다른 걸 먹어보고 싶어서 메뉴판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다 스패니쉬 연유 라테라는 게 눈에 띄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달고 따뜻한 게 마시고 싶었다. 스패니쉬 연유 라테는 5,600원이었는데 그걸 사면 이천 원이 남게 되었다. 내 돈을 더 주고 조각 케이크를 먹을까 하다 계산대 앞에 이쁘게 포장되어있는 마들렌이 보였다. 평소 계산대 앞에 놓여있는 초콜릿이나 쿠키는 잘 안 사는데 오늘은 이 마들렌을 먹어보고 싶었다. 내 카드로 200원을 더 결제하고 스패니쉬 연유 라테와 마들렌을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스패니쉬 연유 라테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향은 왠지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했다. 마들렌은 버터향이 적당히 나면서 속이 매우 촉촉했다. 느끼하지도 않고 너무 부드러워서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챙겨 온 다이어리와 펜을 가방에서 꺼내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오늘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았다"
올라오는 생각을 심오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한테서 카톡이 왔다.
"누나, 이 스카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거 한 개 골라서 알려줘"
카톡창에는 스카프를 맨 외국인 모델의 사진이 있었다. 쓰고 있던 일기를 멈추고 스카프 사진을 봤다. 동생이 쇼핑을 하다가 갑자기 스카프를 사 준다는 건가? 빨리 알려달라고 해서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보내준 옵션 중 핑크색 나뭇잎과 호피무늬가 오묘하게 섞여있는, 밝은 느낌의 스카프를 골랐다. 호피무늬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스카프는 돌돌 말아서 매면 왠지 이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다이어리로 다시 돌아갔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다시 진지모드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엄마한테서 카톡이 왔다.
동생이 스카프를 사 준다고 하니 나도 하나 고르라고 하셨다. 내가 이미 동생과 카톡을 주고받았고 나도 한 개를 골랐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동생이 스카프를 사주는 게 부담이 된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이 스카프는 한 장에 몇십만 원이 훌쩍 넘는 명품 에르메스였다. 에르메스 스카프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는 높은 가격에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동생이 정가보다 할인을 많이 받아 살 수 있었던 거였다. 할인을 받아도 높을 가격에 평소 잘 매지도 않는 스카프를, 그것도 몇십만 원짜리 스카프를 받아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걱정하는 엄마에게 나는 동생이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니 그냥 고맙게 받자고 했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동생의 월급을 축낸 것 같았고 백수 누나가 명품 에르메스 스카프를 받을 자격이 있나 싶었다. 동생이 준 스카프 사진을 다시 보니 다 고급스럽고 이뻐 보였다. 아까 선택한 디자인 말고 다른 스카프를 살걸 그랬나? 에르메스 스카프는 어떤 종류가 더 있을까? 스카프는 옷에 어떻게 코디하는 거지? 하며 심각하게 써 내려가던 다이어리는 뒷전으로 하고 온 신경이 스카프로 쏠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유튜브로 스카프 이쁘게 매는 법까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다이어리는 몇 줄 쓰지도 못하고 스카프만 쳐다보다 카페를 나왔다.
나는 이제 돈도 못 버는 백수구나하며 나는 나 자신을 계속 코너로 몰아가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암울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를 돌아보니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료로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먹었고 읽고 싶었던 책을 앉아서 편하게 정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매 본 적 없는 명품 스카프까지 선물로 받게 되었다.
지금 잠깐 돈을 못 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있으려고 했을까?
앞으로 내 삶에 또 다른 기회와 좋은 날들이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위축되어 있었을까?
지금 내 상황이 상황인 만큼 편하게만 있을 수만은 없지만 그렇기에 요즘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다가오는 풍요를 다 받아들이자